아는만큼 보인다

일본이 키워준 이병도와 그 후예들 강단사학 점령

진실의 역사

일본이 키워준 이병도와 그 후예들, 강단사학을 점령하다.

 

근대적 역사 서술과 조선사 편찬이라는 허울 좋은 구실로 우리 고대사를 삭제한 일제는 도처에 식민사관의 독버섯을 심어 놓고 물러갔다.

그 치명적 독버섯 중의 하나가 일제의 하수인 노릇을 했던 이병도李丙燾이다.


이병도는 서인과 노론의 대표적 가문의 하나인 우봉 이씨牛峰李氏의 후예로 태어났다.

보광학교와 일본인이 운영하던 불교 고등학교를 다녔고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한 후 와세다대학 ‘사학 및 사회학과’를 졸업한 국내 최초의 대학 출신 역사학자이다.

일본 유학은 이병도의 역사관 정립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병도에게 영향을 준 일본 학자는 요시다 도고吉田東伍,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廣이다.

이병도는 자신의 생애에 ‘가장 영향력을 많이 준 사람’으로 요시다를 꼽았다.

이병도가 서양사를 전공하려다가 한국사로 방향을 바꾼 계기는 바로 요시다가 쓴 『일한고사단日韓古史斷』이었다.

요시다는 일본이 조선 국권 강탈 이전부터 식민사학을 준비하는 데 절대적인 구실을 한 인물이다.

이병도와 그의 선후배 한국 유학생들은 요시다에게, ‘일본이 한국을 동화시키려고 하는데 과연 그렇게 될지’ 질문을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요시다는 “단시일엔 안 된다. 그러나 앞으로 50년만 이 상태가 계속되면 반드시 동화가 될 것이다”라고 자신 있게 답했다고 한다. (김정희, ‘식민사관을 계승한 이병도 사관’, 『청산하지 못한 역사』 3집)

 

이병도는 요시다 후임으로 온 쓰다 소우키치 밑에서 강의를 들으면서 국사를 연구해 보겠다는 뜻을 굳히고, 쓰다의 지도 아래 역사 연구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쓰다의 소개로 동경제국대학 교수 이케우치 히로시를 만나 사적인 지도를 받았다.
동경제국대학 사학과는 실증사학을 창시한 랑케의 제자 리스L. Riess를 초빙하여 창설한 학과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실증사학이 일본 사학계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케우치는 만주를 일본 손에 넣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진 만철조사부라는 기관에 학문적으로 참여한 제국주의 사학자이고, 이병도를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도록 추천하였다.

이병도가 제국주의 식민사관을 가진 일본 학자들에게 영향을 받은 데에서 우리나라 근대 역사학의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이병도는 1925년 조선사편수회에서 수사관보修史官補로 학문적 연구를 시작했다.

이병도는 이마니시 류今西龍와 함께 고려 이전 시기를 담당했고 자연히 주로 고대사를 연구했다.

그런데 이병도는 “우리 사회는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철기 시대로 들어온 일종의 변칙적 발전”을 하였다고 확신하였다.

한사군 이전은 미개사회이고 한사군이 우리나라에 철기 문화를 전래한 이후 국가가 성립되었다고 하였고, 고려 시대까지도 낙후한 도참사상에 의해 지배되었다고 보았다.

이처럼 우리나라 문명이 중국의 식민지 지배를 받으면서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보았으니,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연구 결과를 낸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런 결과는 모두 일본 사학자들이 실증사학이라는 미명하에 한국 고대사를 부정한 것을 그대로 답습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이병도는 와세다 대학 동창, 경성제대 출신 학자들과 함께 1934년에 진단학회震檀學會를 만들었다.

그 주요 구성원은 조선사편수회 활동도 함께 하고 있었다.

따라서 진단학회도 일본의 논리를 크게 벗어날 수 없었다.
안타깝게도 해방 후 이들이 국사학계를 주도하였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백남운白南雲(1894~1979) 같은 사회경제사학 계열의 사학자들이 월북하고, 안재홍安在鴻(1891~1965)과 정인보鄭寅普(1893~1950) 같은 민족사학의 거목이 납북되자, 이병도와 그 제자들은 식민사학을 실증사학으로 위장시켜 한국 역사학계를 좌지우지하였다.

해방 이후 이병도의 주요한 근거지는 ‘국사편찬위원회’였다.

이병도는 신석호, 김상기 등과 함께 임시 중등국사교원 양성소를 설치하여 교원 양성에 앞장섰고, 국사편찬위원회 창설에 일등 공신 노릇을 했다.

 

그런데 광복 후 국내 사학계를 이처럼 식민사학자들이 장악할 수 있었던 데에는 정치적 배경도 작용하였다.

일본이 물러가고 이 땅에 들어선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이 친일파 관리와 학자를 기용한 것이다.

미군정 3년이 끝난 뒤 이승만 정부는 친일파 숙청 건의를 묵살하고, 심지어 반민족 행위자를 처벌하기 위해 제헌 국회에 설치한 반민특위反民特委 의 활동도 무산시켰다.

해방 후 독립운동의 공로로 훈장을 받은 사람은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이시영뿐이었다.

이렇게 친일파가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였기 때문에 국내 사학계도 이병도 일파가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는 2차대전이 종결된 후 나치에 협력한 사람 70만 명을 체포하고, 1만 8천명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중국도 중일전쟁 당시 일본에 협력한 민족반역자 십 수만 명을 총살하거나 처벌하였다.

필리핀, 베트남, 미얀마 역시 태평양전쟁이 끝난 후 자국의 친일파를 청산하였다.

무려 35년 동안 일제의 악랄한 지배를 받은 대한민국은 오히려 친일파 청산을 하기는커녕, 친일파를 등용하여 출세의 기반을 만들어 준 유일한 나라이다.

이병도 후손들은 3대 동안 11명의 교수진을 배출하며 말 그대로 황금계보를 이으면서 서울대총장 ,문화재청장등을 역임했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심각한 부패는 이런 부도덕성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다.

이병도는 서울대학교에서 한국사를 가르치면서 이기백, 김철준, 변태섭 등 2세대 사학자를 양성하였다.

2세대는 노태돈, 이기동 같은 3세대를 양성했고, 3세대는 송호정으로 대표되는 4세대를 배출하였다.

송호정은 한국교원대에서 교편을 잡아 식민사관에 물든 역사 교사를 대거 양성하고 있다. (김종서, 『신화로 날조되어 온 신시·단군조선사 연구』, 72~74쪽)

 

이병도와 그 제자들은 쓰다의 조선사 이론에 조선 후기의 노론사관을 가미해 만든 이론을 한국사의 정설로 만들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한국 사학계는 식민사관과 노론사관에 젖줄을 대고 있다.

노론사관이란 한국 학계가 조선 후기사를 인식하는 사관을 말한다.

노론의 뿌리는 광해군을 명나라의 배신자로 몰아 축출하고 그 대신 인조를 앉힌 서인들이다.

서인이 남인에게 정권을 빼앗겼다가 다시 찾은 후,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다.

남인에게 역모 죄를 뒤집어씌워 죽인 주동자 그룹이 노론이다.

조선 멸망 때까지 거의 늘 정권을 장악한 노론의 상당수가 일제의 조선 침탈에 협력하였다.

이 노론 출신의 학자들이 조선사편수회를 거쳐 해방 후 한국 사학계의 주류가 되었다. (노론사관은 또 다른 사대주의 사관이다<한겨레신문>,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노론사관에 일그러진 조선후기사”, 2009. 7. 18)

그들은 이론異論을 제기하는 학자는 무조건 재야사학자로 몰아 추방하고 역사 해석권을 독점하였다.

 

이병도의 호를 따서 두계斗溪학파라 불리는 그들의 파렴치하고도 부끄러운 일화가 있다.

1979년 충북 중원에서 고구려비가 발견된 적이 있다.

그런데 비문의 여러 부분이 풍상으로 마모가 심해 학자들 간에 해석이 다양하였다.

이병도는 이 비석 앞면 상단의 잘 보이지 않는 제액題額을 건흥建興 4년이라 판독하였다. 

다른 학자들이 그 논거를 묻자 이병도는 “오매불망 끝에 꿈에 건흥 4년이 나타났다”라고 답했고, 제자들은 “이 학문적 집념을 배워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는 사석에서 오고간 이야기가 아니라 학회에서 발표되어 학술지에 게재된 실제 사건이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건흥은 고구려 장수왕의 연호이다.

건흥 4년이 장수왕의 재위 4년이라면, 이때는 CE 416년이다.
이것은 스승이 잘못된 주장을 했다고 하더라도 제자들이 그것을 말릴 수 없고, 더욱이 그것이 학술지에 게재될 수밖에 없는 우리 사학계의 풍토를 단적으로 드러낸 사례이다.

 

자신들의 견해에 도전하는 무리들은 재야사학이라는 이름으로 매도하면서, 이병도의 말도 되지 않는 ‘현몽’ 논거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이병도와 그 제자들의 학문적 양심이다.

역사가가 정확하게 역사를 기술하는 것은 미덕이기 이전에 신성한 의무다.

그러나 한국의 국사학계, 특히 두계학파는 그러지 못했다.

이병도와 그 제자들은 우리나라 사학계,특히 고대사 학계를 장악했다.

대통령의 가야사 복원 지원을 비난하는 고대사학자들 - 이덕일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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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가 최태영의 권유대로 과거를 반성하고, 이를 그의 제자들이 받아들였다면 지금 어떤 일이 발생했을까?

지금 한국의 사학자들 대부분은 매국사학자라는 비난 대신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역사학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제자들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니뽄사(일본사)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고, 한국사는 니뽄사의 지방사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버릴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문재인 대통령이 가야사 연구를 제안하자 고대사 연구자들이 대거 비난하고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간 가야사를 빙자해 임나사를 연구했던 것이다.
『삼국유사』는 가야가 서기 42년에 건국했다고 나오고,

『삼국사기』는 서기 77년(탈해 이사금 21년)에 신라의 아찬 길문이 가야와 싸워 이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삼국유사』는 모두 서기 1세기에 가야가 존재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한국사를 빙자했지만 실제로는 니뽄사를 했던 고대사학자들은 4세기에도 가야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설혹 존재했어도 아주 조그만 동네국가들에 불과했다고 주장한다.

 

2005년만 해도 한일역사연구공동위원회처럼 국민세금으로 ‘쓰다 선생님 만세! 이마니시 선생님 만세!’를 외쳐도 모두가 한 통속이었기에 그냥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동북아역사왜곡특위의 국회의원들과 나를 비롯한 역사학자들, 그리고 이종찬 전 국정원장 같은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이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한겨레 21」 편집장 길윤형이 이런 매국사업을 비판한 국회의원들과 역사학자들,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국뽕 3각연대’라고 거품 물고 비난한 것이다.

정확히 조선총독부 경무국 고등계 형사의 인식과 일치한다.

정치가(독립운동가), 역사학자, 독립운동가 후손들이야 말로 일제 고등계 형사들이 기를 쓰고 죽이려던 존재들이 아니었나?

매국사학자들은 이병도가 매국사학을 추종할 때만 태두로 모신다.

감히 '쓰다 소키치' 선생님, '이마니시 류' 선생님을 넘어서려 하면 용서하지 않는다.

이것을 이문영은 역사학계가 스승에게도 대든 사례로 든다. 희한한 머리구조다.

 

유사역사학이라는 용어의 출처와 『환단고기』
학부 출신의 이문영이 교수 출신의 매국사학자들보다 나은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유사역사학’이라는 용어를 따온 것이다.

그가 고안했다고 하지 않고 따왔다고 하는 이유는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용어를 빌려온 것이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조선총독부 만세가 가득 차다 보니 조선총독부식으로 사고하게 된 듯하다.

조선총독부는 1925년 『조선의 유사종교(朝鮮の類似宗敎)』라는 책을 발간했는데, 여기에 천도교, 동학교, 단군교, 대종교, 보천교, 증산교 등의 민족종교를 ‘유사종교’로 꼽아 탄압했다.

또한 미륵불교, 불법연구회 등의 불교단체도 ‘유사종교’로 꼽았다.

지금 매국사학에서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비판하면 학위가 있어도, 없어도 ‘유사사학자’로 모는 방식과 완전히 같다.

“조선총독부는 우리 곁에 영원히 살아계시다. 천황폐하와 조선총독 각하들은 영원히 우리의 앞길을 지도하신다!”는 충성선언의 무한반복이다.

 

이문영이가 나섰는데 『환단고기』에 대한 비난이 빠질 수 없다.

이문영은 「한겨레 21」에서 “이덕일은 초창기에는 약하게 <환단고기>의 사실성을 주장했지만 최근 세계환단학회(2016년)에 나가서 <환단고기>의 역사성을 주장하기까지 했다.”라고 글의 끝을 맺었다.

무슨 수를 쓰든지 나를 『환단고기』 추종자로 몰기 위해서 광분한다.

그러나 계연수가 편찬한 『환단고기』 범례에 따르면 ‘홍범도, 오동진’ 두 독립운동가가 출간자금을 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진위 논쟁은 앞으로 역사학적 방법론에 따라 오랜 시간을 두고 검토할 문제지만 매국사학자들처럼 『환단고기』를 보는 자는 다 죽여야 한다’고 거품을 물 책은 아니다.

 

『환단고기』에 대한 내 생각은 추후 자세히 밝힐 것이지만 한두가지만 미리 말하겠다.

매국사학자들은 《환단고기》가 지 애미를 잡아먹었는지, 지 애비를 잡아먹었는지 모르겠지만 극도로 저주한다.

박노자도 「한겨레 21」과 인터뷰에서 『환단고기』에 대한 저주를 늘어놓았다.

나는 어떤 책이든 자유롭게 보고, 자유롭게 연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진위판정은 다양한 역사학적 방법론을 사용해 『환단고기』를 교차검증한 후에 내려도 늦지 않다고 생각한다.

 

1911년에 편찬되었다는 『환단고기』에 수천년 전의 내용이 적혀 있으면 역사학적 방법론에 따라서 검증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매국사학자들은 『환단고기』에 대한 검증 자체를 거부한다.

학문의 다양성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일제가 한 세기 전 박은식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대하는 자세와 같고, 유신, 5공정권이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대하는 자세와 같다.

2016년에 세계 환단학회에서 기조강연을 부탁하기에 나는 기조강연보다 논문을 써서 발표하겠다고 제안했다.

이 논문은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문영은 역사학계에서는 “『환단고기』는 위서”라는 학문적 분석을 내놓았다’고 주장했다.

역사학계의 학문적 분석을 하나만 살펴보자.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 ‘잠청배(潛淸輩)’라는 용어가 나온다.

『단군세기』는 고려말 공민왕 때 이암이 썼다고 전해지는 책이다. 물론 실제 그런지는 더 검증해야 한다.

그런데 『환단고기』 위서론자인 박광용 교수는 ‘무서운 아이들’의 본거지인 <역사비평(1992)>에 실은 「대종교 관련문헌에 위작 많다」는 논문에서 ‘잠청배’라는 용어를 위서의 근거로 들었다.

박광용은 이를 “‘청에 내통한 무리(潛淸輩)’로 표현한 부분이 있는데…이 서술은 1894년 이후에야 가장 적절하게 맞는 개념이다”라고 비판했다.

잠청배를 ‘청에 내통한 무리’라고 해석해 놓고 위서의 근거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민족사학자였던 임승국은 한단고기(1986)의 번역·주해에서 이를 “잠(潛)이나 청(淸)과 같은 무리”라고 해석했다.

잠청배는 고려 중후기 때의 간신인 오잠(吳潛)과 류청신(柳淸臣)을 뜻한다는 것이다.

1986년에 잠청배의 뜻을 풀이한 주해서가 나왔고, 꽤 많이 팔렸건만 읽어 보지도 않고 1992년에 덮어놓고 비판하다가 큰 망신을 당한 것이 이문영이 말하는 ‘『환단고기』는 위서’라는 역사학계의 학문적 결론이란 것이다.

지금 『환단고기』를 보는 자는 무조건 죽여야 한다고 주창하는 학자들 가운데 『환단고기』를 정독해 본 사람은 1%도 되지 않을 것이다.

매국사학자들이 공부 안 한다는 것은 이제 비밀도 아니다.

우리들 사이에서는 조롱거리가 된 지 오래다.

“왜 저 사람들은 공부 안 할까요?”

“공부하면 할수록 자신들이 배운 것이 틀렸다는 내용이 나오니까 그렇지요.”

“그러면 자신들의 생각을 바꿔야 하지 않나요?”

“평생 안 하던 공부 지금 와서 하겠어요?”

 

이처럼 공부 안 하는 학자들, 한국사를 빙자해 니뽄사(일본사)를 한 학자들이 자신들의 밥 그릇 지키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것에 언론카르텔이 가세한 것이 작금의 상황이다.

그러니 언론의 영향력이 계속 추락하는 것이다.

매국사학자들은 자신들의 밥줄이니 끝까지 버티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겨레, 조선, 경향, 매일경제, 한국일보도 매국사학이 자신들의 밥줄인가?

수많은 독자들, 수많은 광고주들 가운데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정면으로 부인하고, 아직도 조선총독부 만세를 외치는 저들의 역사관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지금 살을 베고 뼈를 깎는 심정으로 대오각성하지 않으면 독자들은 카르텔 언론들의 역사관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보도 내용도 무조건 부인하게 될지 모른다. [한가람 연구소 이덕일 박사님 글 펌]


세계 강대국 치고 자국의 민족사를 바탕으로 해서 국가를 통합하지 않은 나라는 없습니다.

미국도 다민족 국가지만 미국의 건국정신인 청교도 정신에 입각한 자유민주주의 이념으로 다민족을 하나로 묶었습니다.

중국, 일본 등 유럽의 강대국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사학계는 자국사를 깍아내리는데 혈안이 되어 식민사학의 노예로 전락해 자국의 역사에 테러를 가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민족사를 빗대어 ‘국수주의’와 '국뽕’, '환빠’라고 맹비난하는 것은 자신들의 식민사학이 무너질 것을 방어하기 위한 매국행위에 불과한 것입니다.

마치 평생 어미 말을 안 듣던 청개구리가 강가에 제 어미 무덤을 만들어 놓고 비 오는 날 떠내려갈까 봐 미리 요란하게 우는 것과 유사합니다.

 

민족을 배반하고 국익을 해하는 식민사학을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유사역사학’, ‘사이비 역사학’은 본인들 스스로이면서도 적반하장(賊反荷杖)으로 독립운동하며 나라를 지킨 민족사학을 유사역사학이라는 여론몰이를 하는 이들을 이제는 역사의 정의로 준엄하게 심판해야 하는 때입니다.

그런 자들이 민족사학자인 이덕일 박사를 자신들의 명예를 훼손시켰다며 법정에 고발하고 이에 대해 정부에서는 유죄판결을 내렸다가 항소심 2차공판에서 위와 같은 노력에 힘입어 무죄선고를 받았는데 바로 이들이 새 정부 적폐청산 대상 제1호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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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소설을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자칭 소설가였던 이문영이 「한겨레 21(2017. 6. 26)」에는 자신을 ‘역사작가’라고 소개했다.

「한겨레 21」의 청탁을 받고 너무 기뻐서 인터넷에 글을 남겼는데, 유사역사학에 대한 글을 써달라고 청탁하면서

“이런 기사를 내보내면 역풍 엄청납니다. 괜찮겠습니까?”라고 물었다는 것이다.

「한겨레 21」이 처음부터 마음먹고 독자들과 싸우려고 기획했다는 뜻이다.

단군 죽이기를 마음먹고 특집으로 꾸밀 정도면 순간의 일탈이 아니라 조선총독부 역사관 수호가 신념이라는 뜻이다.

이문영은 “그런 건 무섭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단다.

 

내 주위는 대부분 책 깨나 보는 사람들인데 아직 이문영 소설을 읽어본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

그러니 이문영이 소설가로서는 밥 먹고 살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총독부 역사관 수호의 전위대로 나서니 『매일경제』에서 연재지면을 주고 「한겨레 21」에서도 청탁을 한다.

역시 대단한 카르텔이다.

당초 「한겨레 21」에서는 학사출신의 이문영이 아니라 그럴듯한 대학의 교수를 필자로 섭외했을텐데 모두 내뺐을 것이다.

도종환 후보자를 맹비난하던 ‘한국고대사학회장 하일식, 윤내현 교수가 자신의 뒷자리를 준 단국대 심재훈, 『조선일보』에서 “국사학계의 무서운 아이들”이란 닉네임을 붙여준 기경량’을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청문회에 불러 멍석을 깔아주었다.

그러자 모두 학회 핑계를 대며 도망갔다.

이문영이 그간 소설 인세로 몇 푼을 벌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소설을 본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것으로 봐서 소설가로 먹고 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매국사학 전위대로 나서니 인생에 반전이 일어났다.

이 신문, 저 신문에서 지면을 주고 고대사학회는 한성 백제박물관에 초청해 강연 자리까지 마련해 주었다.

이리 계산하나 저리 계산하나 남는 장사다. 그러니 그는 전위대의 역할에 충실하다.

그래서 적반하장은 이문영의 특징이다.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비판하는 학자들을 ‘유사역사학자’라고 비판하는 것으로 ‘조선총독부는 우리 곁에 영원히 살아계시다’를 되뇌이면서도 『매일경제』에 때로는 ‘심산 김창숙이 그립다’ 운운의 글도 쓴다.

물론 김창숙이 실제로 살아 있다면 이승만이 그랬던 것처럼 죽이자고 달려들었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 이병도는 침묵하고 문정창, 박창암은 비판하고.
총독부 역사관을 비판했던 인사들을 극우파나 쿠데타 동조세력으로 모는 것은 이문영의 특기다.

이문영은 광복 후 민족사학에 전념했던 문정창에 대해 “황해도 내무부 사회과장(이사관)을 지낸 일제 부역자”라고 비판했다.

문정창이 일제 때 관료를 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광복 후 자신의 행위가 잘못되었다는 점을 반성하고, 남은 평생을 사재를 털어 일제가 왜곡한 한국사 바로잡기에 바쳤다.

이문영은 이 사실은 절대 말하지 않는다.

 

『자유』지를 창건한 박창암 장군에 대해서는 간도특설대 출신이자 5·16쿠데타에 가담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박창암 장군이 박정희에게 민정이양을 계속 촉구하다가 박임항·김동하 장군 등과 반혁명사건으로 체포되어 숱한 고문을 당한 끝에 13년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는 사실도 절대 말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질이 안 좋다.

 

반면 자신이 추앙하는 국사학계의 태두 이병도의 행적에 대해서는 모른 체한다.

이병도가 조선총독부 직속의 조선사편수회에서 일본인 스승들과 함께 한국사를 난도질한 장본인이란 사실은 일단 제외하자.

이병도는 이승만 정권 때 인간백정으로 불렸던 관동군 헌병 출신 김창룡 방첩대장(중장)의 묘갈명을 썼다.

이 묘갈명에서 이병도는 “간첩오렬 부역자 기타를 검거 처단함이 근 2만5천 명”이라고 칭송했다.

김창룡이 반 이승만 세력을 용공으로 몰아 하도 많이 죽이자 군부 내 양심세력인 허태영 대령이 1956년 처단하고 사형 당했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아버님이 허태영 대령을 참군인이라고 칭찬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이병도는 거꾸로 김창룡을 칭송한다. 이병도가 김창룡을 칭찬한 이유가 있다.

이병도는 광복 직후 진단학회에서 쫓겨났다가 1950년의 6·25사변으로 화려하게 재기했다.

 

김창룡의 반 이승만 세력 숙청은 곧 자신의 재기의 발판이었다.

그래서 1954년 진단학회 이사장으로 복귀한다.

이병도는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국가재건최고회의 기관지 『최고회의보』 창간호에 「5·16군사혁명의 역사적 의의」라는 글을 써서 쿠데타를 칭송하고, 학술원 원장 등 각종 요직을 꿰찬다.

1980년 전두환 정권에서 국정자문위원에 이르기까지 이병도는 친일, 독재 미화의 삶으로 일관했다.

이런 이병도의 행적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는 이문영은 반성의 삶을 살았던 문정창, 박창암의 전력만 극력 비난한다.

 

* 매국사학의 진정한 스승은 여전히 일본인 식민사학자들.
지금 매국사관을 비판하는 학자들 대다수는 문정창, 박창암 등과 아무런 상관없다는 사실도 모른 체 하고 덮어 씌운다.

일제 고등계 순사 앞잡이 수법과 유신, 5공 때 용공조작 수법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니 정체성이 같은 「한겨레 21」에서 원고 청탁을 했을 것이다.

지금 매국사관을 비판하는 학자들과 시민들 대다수는 80년대 이후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로서 문정창, 박창암이란 이름도 몰랐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공부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사학계 대다수가 조선총독부 사관을 추종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비판적 인식을 갖게 된 사람들이다. 이들의 특징은 고대사부터 근현대사까지 일이관지하는 역사관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고대사도 비판하고, 이승만·박정희 정권도 비판한다.

‘조선총독부는 영원히 우리 곁에 살아계시다!’는 고대사학계는 말할 것도 없고, 근현대사는 비판적으로 보면서도 고대사는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추종하는 이른바 짝퉁 진보 근현대사학자들의 분절적, 쪼가리 역사인식도 웃기는 짓거리로 본다. 

이문영의 웃기는 자화자찬은 한 둘이 아닌데 그 중 하나가 이병도의 제자들이 이병도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사건이 있다.

이문영은 한국 역사학계는 스승에게도 반기를 들 수 있다는 사례로 설명한다.

 

서울법대 학장이었던 최태영 선생이 이병도를 만나서 1차사료를 가지고 설득하자 이병도가 단군을 인정했다고 알려진 사건이다.

그러자 그 제자들이 최태영이 협박했다는 등 이병도가 노망났다는 등 비판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일화이다.

이것이 이문영의 머리속에는 한국 역사학계는 스승에게도 대들 수 있는 사례로 둔갑한다.

이병도의 제자들이 이병도를 비판한 것은 이병도가 조선총독부 역사관에서 벗어나려 했기 때문이다.

이병도가 광복 후에도 한국사를 빙자해 니뽄사(Nippon History:일본사)를 하는 매국사학자들의 태두로 추앙받은 것은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추종한다는 전제 내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병도가 총독부 품을 벗어나서 단군을 인정하려고 하자 그 제자들이 이병도를 짓밟고 직접 진짜 스승인 쓰다 소키치와 이마니시 류 선생님의 품안으로 안긴 사건이다.

이병도는 ‘니뽄사’의 큰 틀 내에서 고대부터 근대까지 니뽄의 식민지였다는 ‘한국지방사’를 관리하는 중간관리자지 최고 책임자는 아니라는 뜻이다.

이는 과장이 아니다. 한 예를 들어보자.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주창한 쓰다 소키치는 백제는 13대 근초고왕(재위 346~375) 때 건국됐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병도는 8대 고이왕(재위 236~286) 때 건국되었다고 100년 정도 끌어올렸다.

그래서 국정 국사교과서나 검인정 교과서는 모두 백제는 3세기 후반 건국했다고 적고 있다.(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임나는 가야의 별칭’이라는 희한한 주장을 한 홍익대학교 김태식은 대한민국 국민세금으로 운영했던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의 한국측 위원이 되어 고이왕 건국설을 부인했다.

물론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서기전 18년 온조대왕이 건국했다고 볼리는 만무하다는 사실은 이제 이 문제에 관심 있는 국민들은 다 눈치 챘다.

김태식은 고이왕이 백제를 건국했다는 것은 “후세 백제인들의 고이왕 중시 관념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다.

이 시기 백제의 발전 정도는 좀 더 낮추어 보아야 할 것(김태식,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2005년)”이라고 주장했다.

서기전 18년 건국이라는 『삼국사기』는 말할 것도 없고, 서기 3세기라는 이병도도 틀렸고, 서기 4세기 중반에 건국했다는 쓰다 소키치 선생님이 맞다는 것이다.

서울교대 임기환은 「동북아역사지도」 문제로 국회 동북아특위 진술회가 열렸을 때 이에 대한 견해를 묻자 ‘학계의 견해와 배치되지 않는다’고 답변해서 여야의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백제는 4세기 중반에야 건국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민세금 47억으로 만든 『동북아역사지도』는 4세기에도 한반도 남부에는 신라도, 백제도, 가야도 그려놓지 않은 것이다.

반복하지만 5개월의 수정기한을 주었는데도 독도는 끝내 그려오지 않았다.

이런 지도사업을 중단시켰다고 「한겨레 21」에서 조선, 경향, 한국과 함께 입에 거품을 물고 맹비난하는 것이다.

[한가람 연구소 이덕일 박사님 글 펌]

친일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

진실의 역사

친일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
친일 후손들은 선대가 물려준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자본에 힘입어 사회의 주류로 성장한 반면,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은 해방된 조국에서조차 선대의 신산한 삶을 그대로 물려받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인호 KBS 이사장의 할아버지인 친일파 이명세 등에 의해 성균관대학교 총장에서 쫓겨난 '조선의 마지막 선비' 심산 김창숙 선생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김창숙 선생의 첫째 아들 김환기는 아버지와 함께 상해 망명길에 올랐고, 아버지의 명을 받아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조선에 잠입했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그 후유증으로 죽었다. 불과 19살이었다.

둘째 아들 김찬기는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중 몇 차례 체포됐다가 풀려났고, 이후 임시정부가 있던 중경으로 망명하였으나 망명 도중 사망하였다. 당시 나이 31살이었다.

셋째 아들 김형기는 다행히 살아남았으나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해 좋은 직업을 얻지 못했고 생활이 곤궁했다.

말년의 김창숙 선생이 이명세 등에 의해서 성균관대학교 총장직에서 축출당하고 여관 방을 전전하며 간신히 생계를 유지할 때, 셋째 아들 김형기가 자동차 운전사를 하며 부친을 부양했다.

이 당시 세상 사람들이 심산의 아들이 운전사 노릇을 한다고 비웃자, 김창숙 선생이 아들을 위해 시 한수를 써 주었다.

두 아들을 독립운동에 바치고 셋째 아들에게 조차 변변한 경제적, 사회적 유산을 물려주지 못한 아버지의 절절한 심정이었으리라.

 

아들에게
내 아들이 차를 끈다고
세상사람 모두가 비웃고 조롱하네.
다시 그 아비를 비방하여
거짓 꾸밈 잘하게
자식을 가르쳤다 이르네.
비웃고 헐뜯은들 무엇이 상심하랴.
편안한 마음으로 생업에 종사하라.
가정의 생계를 돌보는 이 없다면
하루아침 당장에 망하고 말 것이라.
옛적에 연암(燕巖)공은 전을 지어 기렸다.
예덕(穢德)선생을 너희들 조금도 슬퍼하지 마라.
천한 직업 그것이 바로 천직(天職)이니라.

 

《독립운동가 후손은 4분의 3이 월 소득 200만원 이하》
한국일보가 광복 70주년을 맞아 의미 있는 조사를 했다.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의 모임인 광복회 회원 6,381명 전원을 대상으로 생활 실태 조사를 한 것이다.

조사 응답자는 1,115명으로, 뉴스타파가 조사한 친일 후손의 전수 숫자와 거의 비슷하다.

조사에는 독립 유공자 1대가 58명, 자녀 대인 2대가 469명, 손자 대인 3대가 509명, 증손자 대인 4대가 53명 참여했다.

 

독립 유공자 가족들은 ‘사회적 무관심’과 ‘경제적 빈곤’을 토로하고 있었다.

복수 응답으로 ‘과거 겪었거나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에 대해 물었더니 44.6%가 ‘사회적 무관심’을 가장 많이 꼽았다.

그러나 33.9%가 ‘생활의 어려움’을, 33.3%가 ‘연금 승계가 끊길 우려’를 지목해 경제적인 어려움이 크다고 대답한 사람의 비율이 가장 높았다. 경제적으로 얼마나 어렵기에 이런 설문 결과가 나왔을까.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의 월 개인 소득이 200만원을 넘는 경우는 4분의 1도 되지 않았다. 50만원 미만이 10.3%, 50~100만원이 20.9%, 100~200만원이 43%였다. 2015년 3분기 기준으로 2이상 평균 소득이 월440만원 남짓이고 4인 가구 최저 생계비가 166만원 정도인 것을 고려하면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생활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이들의 실질적 소득을 따지고 보면 빈곤층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들이 소유한 자산 역시 국민 평균을 한참 밑돌았다. 70% 이상이 자산 2억원 미만이었다. 다산 5천만원 이하가 28.3%였고, 5천만원 이상 1억원 미만이 21.1%, 1억원 이상 2억원 미만이 20.9%였다. 2013년 기준 한국은행과 통계청의 조사 결과 우리나라 가구당 순자산 3억 3,085만 원에 훨씬 못 미치는 액수다. 뉴스타파가 찾아낸 친일 후손 1,177명 가운데 상당수가 서울, 그것도 강남에 집을 소유하고 여유롭게 살아가는 것과 비교하면 너무 큰 차이다.

이같은 결과는 주관적 계층인식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응답자 중 자신이 ‘하층’에 속한다고 답한 비율이 73.7%을 차지했다.
친일 후손들과 독립운동가 후손의 대조적인 인생행로 가운데 결정적인 것은 바로 학력의 차이였다.

독립운동가 후손 가운데 학력이 중졸 이하인 사람이 40%나 됐다.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무학’이 4.7%, 초졸이 22.8%, 중졸이 12.8%였다. 고졸 학력을 가진 사람은 25.7%로, 전체적으로 고졸 이하가 3분의 2이다. 66%에 달한다.

 

친일파 후손 1,177명 중 학력 전수 조사에서는 서울대 출신이 268명으로 22.8%였다. 연대는 68명, 고려대 51명으로 이른바 SKY 대학 출신이 3분의 1에 달한다. 1,177명의 친일 후손 중 유학을 다녀온 비율은 27%였다. 이 수치는 일반인의 유학비율과 비교하면 150~300배에 이른다.

이런 교육환경 속에서 이들은 부가 대물림 되었다. 당대 누구 못지않은 지식인들이었던, 그래서 누구보다도 배움의 가치를 잘 알았을 독립운동가들은 지금 지하에서 자신의 후손들과 친일파의 후손들을 비교해보며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하는 것이다. 이런 사회가 정의가 구현될 리가 없다.

이런 나라에서 누가 나라가 위태로울 때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겠는가.

그동안 독립운동가 후손들에 대한 국가의 무관심 속에 매국행위를 하는 것이 성공하는 길이라고 가르쳐 온 것밖에 더 되는가.

독립운동가들은 해방 후 정부가 건국 되었음에도 국가에서 예우는 못할망정, 오히려 빨갱이로 몰렸다. 

친일파와 매국노가 성공하는 세상이라면 누가 올바른 정의와 가치를 위해 목숨을 걸겠는가. 기회주의자와 사대주의자가 성공의 표상이라면 나라의 기강이 서지 않고 국법이 흔들린다.

 

한국사학계의 현주소도 위와 별반 차이가 없다.

일제 강점기시절 친일과 일본유학을 발판으로 식민 역사학계의 대두가 된 이병도는 2,3세대 제자들을 길러서 대학과 국사편찬위, 한국학 중앙연구원, 동북아역사재단 등에 포진하여 정부의 지원을 받아 여유롭게 역사연구를 하지만, 민족사학은 '유사사학', '사이비사학'이란 매도와 모멸을 당하면서 정부지원은 커녕 자기 돈을 써가며 연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식민사학이 정통사학으로 자리 잡고, 민족사학이 사이비사학으로 매도되고 있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후에 사가들은 한일 병탄이후 100년사를 친일 100년사로 기록할 것이다.

벌써 100년이 훌쩍 넘어섰다. 이제는 지난 묵은 티끌과 일제의 잔재를 청산해서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워야 한다. 『친일과 망각』

식민 사관의 감춰진 맨얼굴①

진실의 역사

식민 사관의 감춰진 맨얼굴①

일제시대 일본인들의 한국사 연구는 순수한 학문적 동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제국주의 침략의 이론적 도구를 제공하려는 목적으로 추진되었다.

일제 식민사학과 그 후예들은 예나 지금이나 단군을 부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유는 조선은 자가발전의 능력이 없으므로 외세의 지배와 문물전수를 통해 발전되었다는 제국주의 논리를 강변하기 위해서였다.

뉴라이트 역사관도 매 마찬가지다. 기독교 들어오기 전 한국은 미개사회였다가 기독교가 들어오고 선진사회가 되었다는 논리다.

그래서 일제시대는 하나님의 축복이란 말을 문창극이 했던 것이다. 일제시대는 말 그대로 기독교 부흥의 결정적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그러니 과거 수천년 전 기독교가 없을 때, 서양보다 더 강대한 단군의 고조선이 있었다는 것은 애써 삭제하려 한다.

따라서 일제식민사학과 뉴라이트 역사관은 동색이다. 자국의 역사를 일제와 미국의 입장에서 기술을 하고 자국역사를 폄훼를 하고 자기 조상에 테러를 가하는 것이다.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은 일본서기의 기록에 삼국사기 기록이 위배되었으므로 무조건 일본서기는 옳은 역사책이고 식민지 국가의 역사책은 조작된 것으로 몰아온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일본서기에 백제가 야마토 왜를 지해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따라서 이 기록도 일제의 식민지배에 장애가 되므로 거짓기록이라고 우겼다.

일제는 1916년 총독부 주재로 조선 반도사를 편찬하면서 한국사를 반도내로 축소시켰고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비장의 사료를 강탈해서 단군관련기록들을 닥치는 대로 없애 버렸다.

이렇게 몰수되어 태워진 사서만 20여만 권이다.

식민사학자들은 강대국인 일본(?) 미국에는 굴종적이었고, 일제강점기나 해방 후에도 자신의 민족과 민족사를 폄훼했다.

재미있는 사실 중 하나는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기록이 서로 충돌할 때마다 삼국사기의 기록이 사실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일본서기만 믿겠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행동은 성경의 구약창세기는 무조건 믿으면서 우리의 역사서는 위서라고 몰아붙이는 행동과 같다.

이미 모세의 홍해설화는 역사적 대차비교를 한 결과 허구임이 밝혀지지 않았던가. 성경의 모세기적으로 기록된 애굽왕은 버젓이 천수를 누리고 늙어 죽었고, 하물며 접시물에 빠진 사실조차도 없으니 말이다. 이집트의 왕과 병사가 다 죽었다면 국가위기가 와야 함에도 멀쩡히 태평하게 역사가 지속된 것을 어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역사적 사실과 믿음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조선사편수회는 학문조직이 아니었다. 식민지배의 정치적 목적으로 역사를 가공한 것이다.

그런데 해방된 지 7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식민사학 논리를 그대로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강단사학에선 단군을 신화라고 폄하하고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믿을 수 없다며 한국사의 시작을 서기 3세기 이후로 끌어 내리고 있다.

 

《다음은 일제강점기 사이토 총독의 교육시책이다》

1. 먼저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 민족 문화를 상실하게 하라.


2.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과 악행 등을 들춰내 그것을 확장해서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선의 청소년들이 그 조상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라.


3.그러면 조선의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때에 일본의 사적과, 일본의 인물, 문화를 소개하면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 글을 보면 지금 한국인은 사이토의 전략이 적중했음을 알게 된다. 자국 국민이 자국역사를 더럽고 비열하고 추악하다고 폄훼를 하고 일본 미국의 지배를 감사하다고 하는 인간들이 우글거리니 말이다. 이승만이 집권하면서 매국친일파들을 대거 등용한 후유증은 우리역사와 혼을 잃는 결정적 치명타를 안겼다. 해방 후 식민주류사학자들은 이중적 처신으로 생존해 왔다. 총론에서는 식민 사학을 비판하는 척하고 각론으로 들어가서는 식민사학 일색인 것이다.

박은식은 일제가 단군 조선을 말살함으로써 한국사의 시간을 축소시키려는 의도를 잘 알고 있었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사는 조선인이 써야한다”고 강조했다.

일본인이 조선사를 쓴다는 것은 자기 아버지 이름을 이웃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과 같다고 비유했다.

한국사를 자국과 외래 종교 성장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서 왜곡 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은 2007년부터 하버드대학 한국학 연구소에 10억을 주고 한국 상고사 6권을 영문으로 간행했는데 한국의 송호정, 여호규 등 식민사학의 계보를 충실히 따르는 학자들만 선발해서 편찬했다.

그런데 한결같이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식민사관 일색이다. 이를 보고 우당 이회영선생의 손자인 이종찬 전 국정원장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며, 식미사학 해체 범국민운동본부를 발족하였다.

 

식민사학자들이 지금까지 집요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 두 가지다.
하나는 한국사 또는 한국 문화의 발전에는 주체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타율성론이고, 또 하나는 한국사는 내적 발전이 결여되어 있다는 정체성론이다.

한민족은 근대사회로 발전할 수 있는 내적 역량이 없으므로 강대국의 식민지배를 받아야 발전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이 타율성론은 일본인에게는 한국사를 멸시하게 만들었고, 한국인에게는 열등의식을 심어주었다. 곧 식민지배가 한국인에게 시혜를 베풀었다는 것이다.

 

1945년 8월15일 한국인 중에서 해방을 기뻐하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바로 악질 친일파들이었다.

그런데 해방 후 이들이 한국고대사를 장악해서 자기 멋대로 주무를지를 누가 알았겠는가?

겉으로는 식민사학을 비판하면서 속으로는 지지하는 이중적 행보가 이들의 실체다.

윤내현교수가 고조선에 대한 시각을 중국의 고대 1차 사료에 근거해서 반박하자 식민사학계는 윤내현을 재야사학자라고 매도했다.

자기해석하고 다르면 무조건 이단이 되고 '유사역사학', '사이비역사학'이 되고 재야로 몰리는 것이다.

최근에도 이들은 자신들의 학문권력을 지키기 위해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유사역사학, 사이비사학이라는 부정적인 언어를 써가며 자신들의 역사관과 다른 이들에 대하여 온갖 음해를 가하고 있다.

 

특히 고대사의 가장 중요한 쟁점인 한사군에 대해 『한서』, 『후한서』, 『삼국지』 등 그 당시에 기록된 1차 사료에는 한사군의 위치를 하나같이 遼東요동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한반도 안이라고 기록한 사료는 단 하나도 없다.

그동안 식민 사학자들은 중국 고대 사료가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 북부로 비정한 것처럼 사기를 쳐왔다.

 

이병도는 우봉이씨로 항렬로 따지면 이완용의 손자뻘이다. 할아버지는 국토를 팔아먹고 손자뻘 되는 이병도는 역사를 팔아먹었다.

그런데 아직도 그의 후예들이 대한민국의 역사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이병도가 한사군을 그리 강조한 이유는 일제 식민사학은 정체성론에 따른 것이었다.

한국의 고대 사회를 미개한 사회로 간주하고 정복자인 한나라에서 철기 문화가 전래돼서 조선이 크게 발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나라에서 철기가 전래되었다는 1차 사료는 전무하다. 고조선이 미개사회였다는 것 또한 아무런 근거가 없다.

한마디로 역사학자가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다. 식민사학자들의 정신은 일본 극우파이면서 겉으로는 민족사학자로 대접을 받고 싶어 한다.

식민사학자인 이기동 같은 인물이 비난하는 인물은 식민사학을 비판한 학자들이고, 거꾸로 칭찬하면 식민사학을 옹호하는 인물들이라고 보면 100% 들어맞는다.

역사학계가 진정으로 학문을 하는 집단이라면 조선총독부의 시각이 아니라 단재 신채호, 위당 정인보의 학설을 지지하는 학자들도 일정한 세를 형성해야 마땅한데 현실에서는 그런 예를 찾기 힘들다.

신채호, 정인보, 윤내현을 적대하는 학자들은 바글바글하다.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타인의 진출을 조직적으로 방해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조폭의 행태와 다를 바가 없다.

식민사학의 태동배경은 학문이 아니라 식민 지배를 위한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왜 피땀 어린 국민 세금을 지원해서 이들을 지켜주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