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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에 해당되는 글 2건

  1. 묘청의 난 조선 일천년 역사의 최대사건
  2. 일제만행과 친일식민사관

묘청의 난 조선 일천년 역사의 최대사건

진실의 역사

묘청의 난! 조선 일천년 역사의 최대사건

 

묘청의 난은 1135년(인종 13) 묘청 등이 서경(西京 : 지금의 평양)에서 일으킨 난이었다.

단재 신채호(申采浩)는 이 난을 낭불양가(郎佛兩家) 대 한학파(중화사대)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 난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국풍사상은 크게 꺾이고  유교의 사대주의가 득세해 고구려적인 기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애석해 하였다.

 

묘청의 난이 고려사회에 끼친 영향은 컸다.

우선, 서경의 권력구조상의 지위가 격하되면서, 고려 권력구조의 균형이 깨졌다.

즉, 개경 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해왔던 서경세력의 쇠퇴는 개경의 문신 귀족세력의 독주를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문신 귀족세력은 왕권마저 능멸하게 되었다.

따라서, 문신 귀족사회가 안고 있던 정치적·사회경제적인 모순과 폐단은 뒤에 무신정변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서경 천도와 칭제건원 그리고 금나라 정벌을 주장했던 국풍파였던 묘청세력의 패배는 향후 1천년 사대주의가 한국사의 주류를 잡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조선시대 친명사대노선을 주류였던 노론세력은 구한말 외세에 의존해 나라를 팔아먹는 친일매국에 앞장섰다. 

해방 후에도 한반도의 운명은 독립 세력은 밀려나고 외세 사대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와 전통가치는 미신시되거나 비하되고 축소하고 말살되었다.

이들은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며 자국역사를 비하하고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제식민사관을 옹호하며 오히려 자랑스러운 선조들의 역사를 깎아 내리고 있다.

 

지금도 외세 사대주의 식민사학자들은 강대국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한국 고대사 복원을 하려는 의로운 사학자들에 대해서 “유사역사학” “사이비 역사학” “국뽕” 이란 원색적인 비판을 가하면서 자국 역사에 테러를 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역사적 사실을 강대국과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고려해서 우리 스스로 우리역사를 왜곡 축소하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는 고조선과 북부여를 계승하여 고조선이라는 거대한 국가의 영토를 회복하고자 다물이라는 이념을 국시로 썼다.

과거의 광대한 영토를 회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역사가 모두 사라지고 왜곡된 역사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그것은 중국과 일본의 역사 왜곡보다 우리 스스로 국력이 약화되는 과정속에서 사대주의 노선을 걸으면서 중국을 높이고 우리 자신의 역사를 깎아내린 바가 더 크다.

우리나라의 혼을 말살한 대표적인 사가史家는 바로 고려시대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이다.

고려 인종 때 묘청, 정지상 등은 기존 지배세력인 김부식 등과 맞서며 금나라의 외세 압력을 극복하기 위해 금나라 정벌론을 주장했다.

그러면서 서경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결국, 서경 천도를 하자는 묘청의 주장이 김부식 등의 반대로 실패를 하면서 묘청은 반란을 일으키게 되고, 한 달 만에 내부의 모반자에 의해 암살당하게 된다.

남은 무리들도 결국 김부식에 의해 1년 만에 진압을 당하게 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금사金史에는 금태조는 신라사람 김함보의 후손으로 기록하고 있다.

 

신라 귀족 출신인 김부식은 외세에 의존해 국가안존을 유지하겠다는 신라의 사대주의 외교노선의 연장선상에 있는 세력의 중심에 서 있었다.

역사 비평이란 그 시대의 복잡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단편적 평가는 어렵지만 우리 스스로 자주권을 내준 바와 같다.

묘청의 난 실패이후 국풍파는 주력에서 밀려나고 구한말 자주독립세력이던 동학과 독립운동세력 역시 외세에 패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사의 기득권층이 된 외세 사대주의자들은 한국의 정통 보수 세력이 되었다. 

묘청, 정지상, 윤언이등의 칭제稱帝 북벌론으로 고구려의 영광을 되찾자는 ‘서경 천도론파’와 충돌을 거듭하다가 ‘묘청의 난’을 기회로 삼아 민족의 자주적인 지향을 말살한 것이다.

김부식은 묘청을 진압하고 나서 10년 후 삼국사기를 저술하는데, 삼국사기는 대진국(발해)에 대한 언급은 한 줄도 안하고, 통일신라가 우리나라의 국통맥을 잇고 있는 것으로 서술하였고, 삼국시대이전은 다루지 않는 등 우리 시원역사를 제대로 서술하지 않았다.

 

자주파가 결정적으로 꺾인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고려 말과 조선의 사대모화 사상과 유교중심 분위기 속에서 삼국시대 이전의 우리 상고사를 전하는 고서들은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리고 수많은 역사서 수탈 과정 속에서 환단고기와 교차 검증이 가능한 고대 역사를 언급하는 학자가 나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단재 신채호는 조선사 연구초에서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을 ‘조선 역사상 일 천 년이래 제일대사건’이라고 평가했던 것이다.

신채호는 이 사건을  ‘낭가․불교사상 대 유가’, ‘국풍 대 한학파’, ‘독립당 대 사대당’,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한판 전쟁으로 평가했던 것이다.

결국 김부식은 묘청을 진압하는데 성공하고, 벼슬도 높아지게 된다.

그러면서 외세에 의존해 국가의 안위를 보존하고자 하는 정치세력이 나라의 주류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었다.

결국 국혼과 자주 역사정신을 잃은 우리나라는 망국의 길로 들어서서, 종국적으로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는 결과가 되었다고 단재는 한탄하고 있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을 조선유학자들은 ‘괴승의 반역질’이라고 매도했으나 그런 모습을 통해 당시 유학자들도 또한 김부식이 가지고 있는 사대모화의 가치관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모습임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조선의 사대주의자들은 기자를 은인으로 여기는 등 중국을 숭배하며, 우리 문화와 역사를 스스로 감추고 숨기려 하였다.

그 결과 우리의 본래 역사는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단재는 일제에 몸을 의탁한 친일파를 비롯하여, 나라를 일본에 팔았던 조선 유학자들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지금 역사학 또한 그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이렇듯 심각한 역사 왜곡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사대주의, 식민사학이 주류인 한국 역사학계에서 단재 신채호에 대한 거부감은 상상이상이다.

 

얼마전 뉴라이트 계열의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이 공개학술세미나에서 “단재 신채호는 네 자로 말하면 정신병자이고, 세자로 말하면 또라이”라고 말한 사실은 학계에서 다 아는 사실이다.

국가 예산을 250억씩 매년마다 받아서 쓰는 사업단장의 말이다.

뤼순감옥에서 쓸쓸하게 옥사한 단재 신채호를 두 번 죽이는 것이다.

 

“화룡(畵龍) 천 년에 진룡(眞龍)이 강림(降臨)이라. 나중에 청룡, 황룡이 들끓어 올라 인성(人城)을 쌓는 이로운 자리니라.” 하시고

“집 안 새(鳥)가 봉(鳳)이 될 줄을 누가 알까. 참된 줄을 알면 네 차례가 오겠느냐.” 하시니라. (道典 3:304)
 ☞천자문화의 종주였던 동이東夷, 『양서』를 비롯한 여러 사서에 "동이국왈조선(東夷國曰朝鮮)"이라 기록하고 있다.

“동이의 나라는 조선이다.”

그리고 천자라는 말은 중국 한족이 먼저 쓴 게 아니다. 

우리 한민족이 먼저 썼다는 사실이 중국  후한시대의 채옹(蔡邕)은 『독단(獨斷)』에는 천자제도의 근원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천자는 동이족 임금의 호칭이다. 하늘을 아버지, 땅을 어머니로 섬기는 까닭에 하늘의 아들이라 한다(天子, 夷狄之所稱, 父天母地故, 稱天子).”

 

용龍은 천자를 상징한다.

본래 칭제건원으로 고려 초 자주적 연호를 썼던 천자국天子國이던 한민족이 천여년 동안 중화 사대주의 노선을 걸으면서 중국 연호를 쓰면서 주권을 상실했지만 천년이후 천자문화의 종주권을 회복한다는 말씀이다.

바로 천자문화의 종주국이었음을 여실히 밝혀주는 사서가 바로 『환단고기』이다.

그러나 유교사대노선을 걸었던 조선에서 감추어서 전할 수밖에 없던 사서가 안함로(신라:579~640)에서 이맥(조선:1455~1528)까지 천년에 걸쳐 기록되고 마침내 1911년 계연수에 의해 합본이 되어 『환단고기』로 엮여진 것이다.

비로소 한국은 천년의 어둠을 뚫고 역사문화의 종주국의 위상을 회복되고 남북통일이 이루고 주역에서 말한대로 동북간방東北艮方인 한반도에서 인류역사가 결실하는 운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時節花明三月雨요 風流酒洗百年塵이라
시절화명삼월우 풍류주세백년진
철 꽃은 내 도덕의 삼월 비에 밝게 피고
온 세상의 백년 티끌 내 무극대도의 풍류주로 씻노라. (道典 8:44)
☞일제시대 이후 역사문화가 완전히 뿌리 뽑힌 지 백년세월이 지나야 역사가 회복되는 운을 맞이해서 한민족의 광명문화가 드러남을 의미한다.

일제만행과 친일식민사관

진실의 역사

일제만행과 친일식민사관
한국에는 어찌 보면 진정한 보수가 없다.

해방 후 정권을 잡은 주세력은 친일파였고 그 인물들이 주축이 되어 내내 친미주의자로 전향되었다.

일본은 자신의 고유정신에 기초하여 서구 문물을 받아들였고 그들의 고유문화에 기초해 선진국을 이루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우리의 전통가치를 멸시하고 배척하였다.

외세를 등에 업은 사대주의 세력들은 우리 전통가치를 미신과 근대화란 미명하에 쌍그리 부셔버렸다.

정의보다는 개인적 시세의 이로움에 밝은 이들에게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보존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묘청의 난 이후 사대주의자들이 천년 역사의 대권을 잡으면서 우리고유의 정신문화, 역사문화는 무시되고 처절히 파괴되고 말았다.
  
일제 침략기를 거쳐 해방이후 한국의 주요 권력을 잡은 그들은 자신들의 성공을 정당화하기 위해 과거의 친일행위를 철저히 숨기고 조선인 800만이 학살된 일제시대를 오히려 찬양하고 있다.

우리선조 8백만이 무참히 살육되고 일제가 왜곡한 역사를 해방된 조국에서 왜 그들의 역사학을 고수하려하는가.

자신의 민족을 무능하다고 비하하고 가해자를 찬양하는게 말이 되는가.

이는 자기 집안에 도둑이 들어서 강제로 훔쳐간 것을 재산을 간수 못해서 뺏겼다고 하는 것과 같다.

 

뉴라이트는 일제 강점기를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선전을 하기까지 한다. 그도 그럴만하다. 역사와 전통가치가 파괴된 한국인에게 외세 식민사대사상이 쉽게 뿌리내릴 수 있었기때문 아니었겠는가. 한국사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것이다.

한국은 외세 사대주의자들에 의해 한국의 주류가 되었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들의 후손들은 여전히 지금도 가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독립운동가들은 나라를 위해 싸웠지만 일제에 의해 한번 죽었고,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지만 부일세력이 주권을 잡으면서 오히려 정부의 위정자들에 의해 두 번 죽어야 했다.

그들의 명예와 신원은 아직도 복원되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고 있다.

이런 나라에 위기가 온다면 누구나 나라를 위하는 것보다는 기회주의자가 되어 매국노 편에 서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란 것을 국가차원에서 가르치는 것이 아닌가.

 

역사를 바로 세우고 정의를 바로 세움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된 근원적 사건은 단재 신채호의 지적처럼 묘청의 난 이후 유교 사대주의자들이 국권을 쥐면서 우리 스스로 유교이념에 어긋난다고 한민족 정통역사와 문화를 이단과 사문난정으로 몰아버렸기 때문이다.

유교 국시인 조선시대 세조, 예조, 성종 때는 사서수서령이 내려지고 우리 고유사서를 소장하면 목을 벤다고 왕명을 내렸으니 누가 우리 역사를 말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조선중기 서인들이 집권하면서 친명 사대사상은 더욱 고착되고 이 사대주의자들이 결국 나라를 일본에 파는 매국노가 된다.

 

결국 명이 강하니 명에 붙었다가, 일본이 강하니 일본에 붙고, 미국이 강하니 미국에 붙으면서 물타기로 천년의 권력을 누리면서 강건한 선비정신의 국풍파 민족주의자들을 정치적 정적으로 몰아서 숙청한 것이다.

사대파와 국풍파의 천년전쟁 중이다.

과거로부터의 해방은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런 역사의 교훈을 통해서 국가가 위기에 빠졌을 때, 영화 밀정에서 의열단장 정채산의 명언처럼

"나는 다만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믿을 뿐입니다.

사람은 언젠가 자신의 이름을 역사 위에 올릴 때가 옵니다.

이 동지는 어느 역사 위에 이름을 올리겠습니까?"

 

독립군은 시세의 이로움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쉬운 길을 선택했어도 됐을 것이다.

남들이 왜 그리 험난한 길을 가냐고 할 때도 그들은 그런 이야기에 현혹되지 않았다.

 

안중근의 명언인 見利思義처럼 말이다. 이익을 볼진대 의로운지 생각을 하라.

그러나 친일파는 그렇지 못했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국난의 위기에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도록 올바른 가치관을 정립하기 위해서다.

이제는 얼룩진 반역의 역사를 매듭 짓고 고유의 민족역사정신에 기초한 민족 대화합과 한민족 통일을 향한 힘찬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사대주의가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영원히 사대주의를 지향할 수는 없다.

이제 100년의 일제의 잔재를 떨고 분연히 일어날 때이다. 결국은 자주 독립국가로서 역사와 문화를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