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상제님께 천제를 올려 온 동방 한민족㉑

생존의 비밀

상제님께 천제를 올려 온 동방 한민족

동방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께 제사 올리는 천제 문화이다.

동방의 한민족은 상고사 시대인 배달국(6천 년 전) 때부터 하늘과 땅과 인간세계를 주관하시는 상제님께 천제天際를 올리는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

배달국의 환웅천황과 고조선의 단군왕검 이래 역대의 모든 제왕이 나라를 건국한 후 가장 먼저 상제님께 천제를 올리고 부국평강富國平康을 기원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경승부윤敬承府尹 변계량이 태종에게 상서上書를 올려 “우리 동방에서는 예로부터 하늘에 제사지내는 예를 1천여 년이 되도록 그친 적이 없으며, 태조 대왕께서도 이에 따라서 더욱 공근恭謹하였습니다(공손하게 삼가 잘 받들었습니다)”라고 고한 내용이 실려 있다.

 

태조[이성계]도 전통에 따라 천제 올리는 예를 받들었으니, 태종도 상제님께 제사를 올려야 한다고 상소를 한 것이다.

이 한마디에서 상제님을 모신 오랜 천제 문화의 역사를 알 수 있다.

 

많은 이들이 동양에서는 하나님을 믿어 오지 않은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서교가 전래된 이후에 비로소 하나님을 믿어온 것으로 대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서교가 전해지기 전부터 국가적 차원에서 국교행사로 왕이 직접 하나님께 천제를 올린 하나님 문화의 본고장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특히 동방문화의 본고장인 환국-배달-조선의 국통을 계승한 한민족은 일찍이 고구려의 동맹東盟, 부여의 영고迎鼓, 동예의 무천舞天, 삼한의 상달제 등은 한민족이 상제님을 모시고 행했던 민족의 축제다.(『삼국유사』)

천제 문화는 이후 중국을 큰집으로 받드는 조선 왕조 유학자들의 사대주의 근성과 명나라의 압력으로 세조 때부터 중단되었다가 근세에 이르러 잠시 복구되었다.

 

조선의 국운이 기울어져가던 조선 말, 1894년에 일어났던 동학혁명에서 충격을 받은 고종이 그 3년 뒤인 1897년에 원구단을 쌓고서 상제님께 천제를 올리고 황제에 즉위한 것이다.

고종 황제는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바꾸고, ‘광무光武’ 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우리나라 국호 대한민국이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나라의 이름을 되찾은 것이 동방의 상제문화를 회복하려 했던 고종 황제의 절규에서 이뤄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후손인 우리는 상제문화를 다 잃어버렸다.

그것은 중국과 일본의 고대사 왜곡 때문이다.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중국인들은 ‘은나라 말에 중국인 기자箕子가 세운 기자箕子조선’ 에서 시작되었으며, 일본인들은 ‘위만衛滿조선’에서 시작되었다 한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조선의 역사는 2,200년밖에 안 된다.

그리고 우리 대한민국 초․중․고의 역사 교과서를 보면 4,342년 전에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했다고 하면서 실제 우리 역사는 2,700년이라고 한다.

 

또 위만이 쳐들어와서 위만조선이 고조선을 계승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4,342년에서 2,700년 사이의 과정이 깨끗이 사라지고 없는 유령의 역사다.

 

그런데 최근 약 100년에 걸쳐 이루어진 발굴 작업을 통해, 동방 한민족 (동이족) 문화의 터전이었던 요하 지방에서, 중국의 황하 문명을 낳은 우리의 고대 문명이 그 위용을 드러냈다.

이것은 기존에 밝혀진 4대 문명권보다 2천~3천 년이나 앞선, 인류의 창세 문명이자 최고最高 문명이다.

홍산 문화라고 일컫는 한민족 배달국의 문화 유적이 발굴된 것이다.

여기에서 상제님께 천제를 올린 제단이 발굴 되었는데, 그 길이가 동서로 160m, 남북으로 50m나 되는 대형 천단이다.

그 모양을 보면 제단의 앞 쪽은 원 모양으로 되어 있고, 중앙은 사각형으로 되어 있다.

이를 ‘천원지방天圓地方’ 형이라 하는데, 이는 ‘하늘’의 정신은 둥글고, 땅의 정신은 방정하다’는 뜻이다.

 

홍산유적에서는 ‘천자문화’의 상징물인 다양한 용봉문양의 옥기玉器가 발굴되었다.

또한 우하량 유적에서는 천지의 주인이신 상제님께 천제를 올린 대형 제단이 발견되었다.

이 일대에는 방형 적석총, 그리고 조상신과 상제님께 제사 지낸 원형 제단[壇]과 여신묘女神廟 같은 신전[廟]이 발굴되었다.

방형方形으로 된 적석총과 원형圓形으로 된 적석재단은 3중으로 둘레를 쌓았다.

 

이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과 묘제는 동방 배달과 고조선의 고유문화다.

중국 북경의 천단 공원과 우리나라 강화도 마리산에 남아 있는 제천단도 천원지방형이다.

그 원형元型이 바로 우하량 제단인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여신묘, 돌무지무덤, 천자를 상징하는 용龍과 봉황鳳凰의 형상물, 그리고 상제문화의 상징인 옥玉 유물도 수천, 수만 점이 나왔다.

옥은 하나님의 마음을 상징하는 가장 순수한 자연 보석이다.

그래서 상제님이 계신 하늘을 옥경玉京, 또는 옥황玉皇이라고 하며 상제님을 옥황상제라고 부르는 것이다.

학자들은 발굴된 옥 유물들에 대해, 지금의 과학 기술로도 그렇게 정교하게 구멍을 뚫고 갈기가 어렵다고 한다.

중국의 일부 학자들은 이 지역에서만은 신석기에서 청동기로 넘어가기 전에 옥기 시대가 있었다고까지 이야기를 한다.

이로써 그동안 일제에 의해 왜곡되어 신화로만 알고 있었던 한민족의 고대 나라인 ‘환국-배달-고조선’이 엄연히 실제로 존재했던 나라라는 명백한 근거가 드러난 것이다.

 

이 때문에 자기네 문화가 인류 문화의 원류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던 중국이 발칵 뒤집어졌다.

유적이 발굴되자 중국 정부와 역사학자들은 재빨리 홍산 문화를 중국문화로 편입시켜 버렸다. 그

것이 바로 2002년부터 시행한 그 유명한 동북공정東北工程이다.

 

동북공정이란 현재의 중국 땅 안에서 일어났던 이전의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만드는 연구 프로젝트를 말한다.

2010년이면 그 모든 공정이 끝나서 한민족의 고대사는 물론 고구려 역사 등 우리의 역사를 완전히 자기네 역사로 왜곡시킨 교과서가 나오고, 이러한 사실을 전 세계에 공표했다.

 

이렇게 중국이 한민족 역사를 유린하고 있는데 정작이 땅의 정치가나 역사학자들은 대부분 외면하면서 침묵만 지키거나 ‘우리 한민족과는 무관하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더 나아가서는 동북공정의 논리에 적극 동조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구한말 조선을 외세에 팔아먹었던 자학사관의 비굴한 모습이자 뿌리 깊은 사대주의의 망령이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기관이 동북아 역사재단이다 재단 이사장과 연구원들이 대부분 식민사학 계보의 인물들이다.

아직도 한국의 주류 사학은 식민사학 계보에서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동북아 역사 재단은 일본. 중국 등 주변국들의 역사 왜곡. 영유권 주장 등에 대응하기 위해 2006년 9월 28일 설립된 교육과학기술부 산하 정부 출연 연구 기관이다.

기존의 고구려연구재단과 통합되어 만들어졌다.

 

그런데 동북아재단 홈페이지 등에서 동북공정의 논리를 그대로 옹호하고 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오히려 홍산문화는 우리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대 사학과 송기호 교수는 2016년 11월 30일 한성백제 박물관에서 개회한 고대사 시민강좌에서 발해 역사마저 우리역사가 아니라는 주장을 펴 충격을 더했다.

 

고대 역사를 현재의 정치적 이해관계로 접근한 것이다.

그는 중국의 동북공정을 비판하면서도 발해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함께 보자는 모순된 주장을 하였다.

나라가 망할 때, 외부 세력에 붕괴되기 보다는 내부적으로 사대주의자와 매국노들이 판을 칠 때 역사정신과 국권이 몰락하면서 외세에 침탈을 당하는 것이다.

적은 내부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한다. 『생존의 비밀』<21>

한사군은 한반도에 있었을까?

진실의 역사

#한국사 : 한사군은 한반도에 있었을까? - 한민족 뿌리역사를 도려낸 일본

 

19세기 중반에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를 시작한 일본은 세계 제패의 꿈을 키우면서 한국을 대륙 진출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식민주의 사관을 확립하였다.

식민주의 사관은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침략과 식민 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 조작한 역사관이다.

조선인을 예로부터 다른 나라의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온 열등감과 자기 비하에 빠진 민족으로 묘사하여 조선을 영원히 지배하겠다는 것이 일제 식민사관의 요지이다.

 

이러한 식민사관의 정립과 실현을 위하여 일제는 조선침략을 군사적으로 준비함과 동시에 자국의 쟁쟁한 사학자들을 동원하여 한국사를 연구하게 하였다.

일본의 한국사 연구는 주로 정치적 필요에 따라 진행된 것으로 결국 한반도 지배를 위한 학문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일본의 대학에는 ‘조선사 강좌’가 설치되고 논문과 저서가 속속 간행되었다.

일본인이 한국사를 이른바 근대 역사학의 방법론을 내세워 주관적으로 서술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사 연구를 반석에 올려놓은 일본의 식민 사학자는 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1854~1922),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1865~1942), 후쿠다 도쿠조福田德三(1874~1930) 등이다.

이 세 사람은 독일에 직접 유학을 하거나 일본 내 대학을 다니면서 실증주의 사학을 공부하였다.

실증주의 사학은 조상의 무덤과 집터를 파헤쳐 꺼낸 유골과 유물을 과학적으로 검증함으로써 문헌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을 고증하려 한다. 그리고 고증되지 않은 기록은 대부분 불신한다.

 

이러한 실증사학의 정신에 따라 식민주의 사학자들은 태곳적 환국-배달-고조선 시대를 고증되지 않은 신화시대로 만들어 버리고, 그 대신 ‘위만조선과 한사군’ 시대를 한민족의 상고 시대라 정의하였다.

 

하야시 다이스케가 『조선사』와 『조선근세사』에서 정한 한국사의 시대 구분이다.

한사군 이전은 태고太古, 삼국에서 통일신라까지는 상고上古, 고려 시대는 중고中古, 조선 시대는 금대今代로 구분하였다(김용섭, 같은 책, 498쪽)

이후 그들은 만철滿鐵조사부를 세워 만주와 한반도의 역사와 지리에 관한 조사를 하였는데, 그 목적은 한국인의 뿌리 역사를 말살하고 그 자리를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 역사’로 채우는 데에 있었다.

 

마침내 1910년에 한국을 강제 병탄한 일제는 자국의 식민주의 사학자를 대거 조선으로 데려왔고, 1920년대에 폭압적인 무단통치에서 유화적인 문화통치로 정책을 바꾸면서 그 학자들을 중심으로 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하였다.

조선사편수회의 일제 관학자들은 조선 역사를 본격적으로 변조하여 조선 역사는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였다.

한반도의 북쪽은 ‘한사군’이라는 중국의 식민지였고, 남쪽은 ‘임나일본부’라는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것이다.

또한 상고 이래의 한일교섭사 중에 일본에 불리한 사실은 모두 은폐하였다.

임진왜란을 마치 일본이 승전한 것처럼 기술하고, 광개토태왕비의 비문과 칠지도 명문을 조작하는 등 우리 역사와 문화재에 손대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일본이 왜곡한 사례 중에서 한국인이라면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한민족사의 밑뿌리를 송두리째 뽑아버린 것으로,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조작한 “석유환인昔有桓因”이다.

1903년 동경제국대 대학원에서 한국사를 전공한 후 조선에 파견된 이마니시 류는 조선 역사를 일본에 미치지 못하는 역사로 깎아 내리기 위해 고심하던 중 마침내 조선의 한 사서에서 실마리를 찾아냈다.

그 사서가 바로 『삼국유사』이다.

그는 조선 중종 1512(壬申)년에 간행된 『삼국유사』 임신본에 적힌 “석유환국昔有桓国”의 ‘국国’ 자를 ‘인因’ 자로 변조시켰다.

‘국’ 자와 ‘인’ 자는 서로 모양이 비슷하여 변조하기가 쉽기도 하지만, 일연이 붙인 ‘제석을 말한다謂帝釋也’는 주석에 힘입어 석유환국을 석유환인으로 과감히 변조한 것이다.

이리하여 환국을 불교 신화에 나오는 나라로 둔갑시키고, 환국을 계승한 배달과 고조선도 허구의 나라로 만들었다.

이것은 실로 ‘한국 고대사의 핵을 도려낸 사건’이다.

이로써 한국사의 영혼이 뿌리 뽑히게 되었다.

일제의 만행으로 7천 년 상고사가 통째로 잘려 나간 것도 통탄스럽지만, 해방 이후 한국 사학계마저 식민사학을 추종하여 환인·환웅·단군을 신화의 인물로 전락시킨 것은 더욱 가슴 아픈 일이다.

중국은 최근 홍산유적이 발굴되면서 중화고대문명탐원공정中華古代文明探源工程을 진행하였다.

이 공정은 하상주단대공정보다 한 술 더 떠서 중국 역사의 시발점을 1만 년 전으로 끌어 올려 중화 문명을 ‘세계 최고最古 문명’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중국은 만리장성 밖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동이 오랑캐문화라 하여 한족문화권으로 보지 않았었다.

그러나 만리장성밖에서 황하문명보다도 수천년 앞선 홍산유적이 대량 발굴되자 이를 중국역사로 편입시키는 작업을 완료하였다. 

 

그러나  옥기문화, 청동유물, 석관묘제, 천원지방형의 원형신전, 용봉유물, 옥웅룡, 웅녀여신상, 수행하는 여신상, 주문읽는 토우, 곰발바닥 등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홍산유적은 북방유목문화의 전형이자 삼국유사에서 전하는 웅족 토템기록을 명확히 증언해주고 있다.

동이문화의 전형적 특성을 보여줌에도 한국학자들은 고조선 문화와는 관계없다고 애써 외면하고 있다.

우리나라 학계가 신화시대로 치부하고 연구조차 하지 않는 작금에  중국은 이 홍산문화의 주인공이  자신들이라고 중국의 고대사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살아 있는 식민사관
1945년에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았지만, 이 땅의 사학은 여전히 식민사학의 잔재를 떨쳐 내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이 땅의 역사 광복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방 후 한국 사학계는 조선사편수회에 몸담고 식민사학의 주구 노릇을 하던 몇몇 학자와 그 후예들에게 잠식되었다.

그들은 지난 식민통치시기에 8백만 이상의 조선인을 참살한 일제가 주장한 식민사관을 실증사학이라는 가면 아래 교묘히 숨겨 그대로 수용하였다.

 

지금도 식민사학계는 이런 홍산유적에 대한 실질적 연구는 외면하고 이미 학계에서는 검증이 끝났다면서 곳곳에서 여론과 인터넷을 통해 실증사학으로 고증이 되지 않는다고 몰면서 식민사학 바이러스를 전파하고 있다.

이들은 우리고대사를 신화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이에 그치지 않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역사상 가장 반인륜적이고 파괴적인 역사관인 식민사관을 옹호하고 변론하였다.

이것은 자국의 역사를 자국민이 파괴하는 해괴한 행위로, 세계인들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는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한사군 재在한반도설’이다.

한사군설은 고조선 말기 한반도 땅에 한나라가 한사군이라는 식민지를 설치하였다는 주장이다.

일제는 대동강 유역에 점제현신사비秥蟬縣神祠碑라는 조작된 유물을 심어놓고, 그 비석을 한사군 유물로 내세워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로 비정하였다.

 

그런데 한국 사학계는 그 조작설을 그대로 따랐다.

최근 그 비석의 화강암 재질을 분석한 결과 위조된 유물임이 드러났지만, 한국인들은 한반도 내 평양 주변에 한사군이 있었다고 배우고, ‘낙랑·임둔·진번·현도’라는 이름을 반세기가 넘도록 열심히 외우고 다녔다. (이병도李丙燾 등이 참여하여 설립한 진단학회에서 1965년에 간행한 『한국사』 7권에 수록)

 

그리고 일제가 내세운 한사군설을 그대로 따라 우리 역사학자들의 손으로 한반도에 한사군을 설정한 것이 빌미가 되어 우리는 지금 다시 중국에게 역사를 빼앗기고 있다.

중국은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설을 동북공정에 적극 활용하여 2,100여 년 전 한나라 때의 중국 영토를 한강 이북까지 확장하였다.

중국의 이 황당한 주장이 서양의 세계사 교과서에 그대로 실려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을 무너뜨리려면 일제 식민사학의 잔재부터 청산해야 한다.

일제의 식민사관과 중국의 동북공정이 한 덩어리가 되어 한국사의 뿌리를 뽑기 때문이다.

중국의 중화 패권주의 사관과 일본의 식민사관은 남의 역사를 강도질하는 패악의 근원이다.

 

초·중·고 교과서에서 우리는 일제가 꾸민 역사 사기극의 잔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환국과 배달의 역사는 전혀 보이지 않고 단지 족장이 다스리던 부족 사회가 있었다고 서술한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고조선의 출현에 대해 “족장 사회에서 가장 먼저 국가로 발전한 것은 고조선이다”라고 하면서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라고 서술한다.

 

얼핏 보아도 너무나 싱거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라는 이 서술조차도 우리 역사를 찾으려는 뜻있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2009년에야 겨우 개정된 내용이다.

그 전까지는 “건국되었다고 한다” 또는 “건국하였다고 한다”라고 하여 남의 나라 역사를 말하듯이, 설사 우리 역사라 해도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는 듯이 서술하였다.


그런데 비단 학교 교과서뿐 아니라 국가공무원 수험서, 육·해·공군의 역사 교재, 아동용 역사책에 이르기까지 이 땅의 모든 역사책에는 일제가 조작한 잘못된 한국사가 기록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일제 식민사학의 여독이 오늘날까지도 모든 한국인의 뼛속 깊이 배어 있는 것이다. 환단고기 안경전 역주

인류 창세사를 다시 쓰게 한 홍산문화③

진실의 역사

인류 창세사를 다시 쓰게 한 홍산문화


【세계 최고最古의 옥玉 문화】
6천여 년 전에 벌써 국가 단계의 복잡한 문명을 일구었다는 사실도 인류의 창세사를 다시 쓸 만큼 충격적인 일이지만, 홍산문화가 세계인을 정말 놀라게 한 것은 바로 정교하고 다양한 옥玉문화이다. 
  
특히 발해연안 지역의 무덤에서 공통적으로 옥기 부장품이 쏟아져 나왔다.

한나라 때 자전인 『설문해자』에 ‘옥玉’ 자를 설명한 내용을 보면, ‘신령 령靈’자는 밑의 무巫가 옥(가운데 ‘입 구口’ 자 3개)을 통해 신과 소통한다는 뜻이라 했다. 인간과 신 사이의 연결자인 무인이 신에게 헌납하는 예물이 바로 옥인 것이다.

중국의 고증학자 왕궈웨이王國維의 해석에 의하면 ‘예禮’ 자는 본디 제기를 뜻하는 ‘두豆’ 자 위에 두 개의 옥[曲]을 올려놓은 형상이다. 즉 예라는 것은 ‘옥을 바쳐 신을 섬기는 것’이다. 요컨대 선사 시대의 석기와 토기는 생활용품이었지만, 옥기는 신을 섬기는 예기로 제작되었다(이형구·이기환, 같은 책, 156~157쪽).
  
이형구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발해연안 고대 문화 중에서 가장 큰 특징은 옥문화입니다. 고대인들의 신앙적인 마음에서 옥을 선호하고 중요하게 여긴 것으로 생각합니다. 변하지 않고 영원불멸하는 옥의 특징을 보면, 용 신앙이라든지 새 신앙이 우리 민족, 동이족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나라 영덕 강구면 오포리에서 나온 곡옥을 보면, 그 모양에 입이 있고 구멍도 나 있어서 어떤 사람은 태아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누에 같다고도 하지만 저는 용이라고 봤습니다.

홍산문화 대릉하 유역에 적석총이나 석관묘에서는 약 20센티미터의 옥이 나오는데 고리에다 끼워서 가슴에 걸었던 것으로 이 또한 용의 형상입니다.

“한국의 곡옥은 용의 변천일 것이다. 중국 사람들은 용신앙의 기원하면 중원지방에서 나온 것으로 알고 있지만 만리장성 너머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중국은 최초의 용의 형상화뿐 아니라 중국문화의 원류가 중원이 아니라 동북지방이라는 것에 깜짝 놀랐다. 그래서 중국은 동북공정을 시작한 것이다.”

부장품이 나온 31기의 묘 가운데, 신석기 시대 무덤에서 흔히 보이는 토기와 석기는 단 한 점도 없이 옥기만 발굴된 묘가 26기나 된다.

특히 제2지점 21호 묘의 남성 인골은 옥으로 옷을 해 입은 듯하다. 옥거북, 옥베개, 옥패玉牌, 옥벽玉璧 등 무려 20점의 옥 장식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시신을 치장하고 있다.

제5지점 중심 대묘에 누워 있는 남성 인골은 양 귀 밑에 옥벽, 가슴팍에 옥장식, 오른팔에 옥팔찌, 양손에 옥거북이 치장되어 있었다. 신령한 거북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죽어서도 신과 소통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이 무덤의 주인공은 제정일치 시대의 제사장이자 정치적 수장으로 간주된다.

 

부장품으로 옥기를 사용한 것은 옥이 변하지 않는 보석으로 영생불멸을 뜻하기 때문이다.

『설문해자』에서 옥을 ‘오덕五德을 갖춘 아름다운 돌’이라 하였고, 공자는 ‘군자는 옥으로 덕을 견준다’고 하였다(君子比德於玉焉(『예기』「빙의聘義」). 그리고 『주역』 「설괘전」에서는 팔괘의 첫째인 건乾괘의 성격을 옥으로 표현하였다(건은 … 옥이다[乾, … 爲玉] 『주역』「설괘전」).

그 까닭은 옥이 하늘의 빛깔과 하나님의 신성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동양에서는 천상의 수도를 옥경玉京이라 불렀고, 옥경에 거하며 삼라만상을 다스리는 우주의 통치자 하느님을 옥황상제玉皇上帝라 부르며 모셨다. 

그래서 홍산인들은 옥을 고귀한 신분을 나타내는 장신구, 신과 소통하는 신물, 천제에 사용하는 제기 등의 소재로 사용하였다. 
  
흔히 고대를 석기-청동기-철기의 3단계로 구분한다. 하지만 발해연안 영역에서 옥기로 뒤덮인 수천 년의 유적지가 대량 발굴됨에 따라 중국학자들은 청동기 이전에 옥기 시대를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고대 동북아의 옥은 홍산문화보다 더 오래된 흥륭와문화(BCE 6200~BCE 5200)에서 발견되기 시작한다.

내몽골 자치구의 오한기敖漢旗에 위치한 흥륭와촌에서 세계 최초의 옥결玉玦(옥 귀걸이)이 발굴되었다. 이 옥결에 사용된 옥은 요동반도의 수암에서 나온 수암옥岫岩玉이다. 수암은 흥륭와촌에서 동쪽으로 450km나 떨어진 곳으로 압록강에서 멀지 않다. 당시 만주의 동쪽에서 난 옥을 서쪽으로 가져가 옥제품으로 가공할 만큼 만주의 동서가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흥륭와문화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옥결이 한반도 동해안과 남해안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특히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 선사유적지의 옥결은 그 외양이 흥륭와문화의 그것과 아주 유사하다. 이러한 유사성은 BCE 6천 년경부터 요서, 요동, 한반도가 하나의 문화권이었음을 뜻한다. 그리고 흥륭와문화에서 시작된 옥 문화가 후대의 홍산문화에서 더욱 다양하고 화려해진 점은, 하나의 연속된 문명이 3,4천 년 동안 지속적으로 발전을 거듭하였음을 보여준다.
  
홍산문화의 옥기 유물을 보면 재질은 수암옥(청황옥青黃玉)이 대부분인데 그 색상은 천연 옥색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도료와 같은 것으로 채색을 한 것도 있다. 검은색의 흑피옥도 출토되었는데, 흑피옥은 중국의 신석기 유적에서는 출토된 바가 없다.
  
요컨대 홍산문화는 동북아 신석기 문화의 최고봉으로서 중국 한족의 것과는 계통이 전혀 다른 문화이다.

오히려 그들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환단 시대 배달 동이족의 독자적인 문화이다.

시베리아과학원의 고고학자 세르게이 알킨 교수도 홍산문화의 독자성에 대해 “홍산문화는 중원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중원문화가 홍산문화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용 문화에 대하여 “중국의 용 문화는 독자적으로 발생하지 않았다. 고대 중국의 기록을 보면 북방 이민족 가운데 용을 토템으로 하는 민족도 있었다고 하는데, 바로 홍산문화의 주인공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라고 구체적으로 밝혔다. 용봉문화의 주인공은 바로 홍산인이었다.

중국에서는 요하지역에서 발견된 이 유적을 ‘신비의 왕국’또는 여신상이 발견되어 ‘여왕국’이라고 부른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문명이었다는 요하문명은 그동안 부단히 고조선 영역이라고 주장되던 곳이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단군조선보다도 빠른 기원전 3,000년~3,500년경에 이미 고대국가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한민족사로 본다면 문헌기록상 배달국에 해당하는 시기다. 중국은 그동안 황하유역에서 태어난 선진 문화가 각지로 전파 됐다는 황하 중심문화를 기본정설로 고수해 왔었다. 

그러나 만리장성 밖에서 기원전 3000~3500년전에 요하지역에 고대국가가 존재한 것이 확인된 것이다.

중국은 이를 근거로 그동안 전설속의 인물이던 삼황오제를 중국의 실존역사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기원전 2,333년에 단군조선이 실재했냐 아니냐, 논쟁을 벌이는 동안 중국에서는 우하량 지역의 신비의 왕국을 중국 시원사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우하량 지역 즉 요령지역은 그동안 빗살무늬토기, 돌무덤, 비파형동검 등이 발견이 되어 동이족의 근거지로 비정되던 곳이었다.

이런 유물들이 나온 지역이라면 우리 조상들이 거주했던 터이며 이런 유물들은 고조선의 표지 유물들이다.

이런 홍산 유적이 우리 고대사임일 밝혀주고 있는 사서가 바로 『환단고기』다. 홍산문화는 환단 시대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올바르게 해석할 수 없다. 환국·배달·고조선이라는 동북아 시원역사를 인정해야 홍산문화를 포함한 발해연안의 그 엄청난 유적과 유물을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 왜 홍산문화를 알아야 하는가
이렇게 유적과 유물이 대부분 ‘사상 처음’이고 ‘인류사 최고最古’인 홍산문화를, 중국은 황하문명보다 2~3천 년 앞선 황하문명의 원류로 규정하였다.

그런데 황하문명의 원 뿌리가 오랑캐 땅이라 치부하던 만리장성 이북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이 중국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중국은 이 난처함을 다민족 역사관으로써 해결하였다. 한족과 55개 소수민족으로 이뤄진 중국 땅에서 발견되는 소수민족의 문화와 역사는 모두 중국의 문화와 역사라는 것이다.
  
현재 중국은 홍산문화를 요하문명이란 이름으로 전 세계에 소개하면서 중국을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문명보다 앞서는 세계 최고最古 문명국으로 내세우고 있다.

홍산문화를 정점으로 화려한 꽃을 피웠던 문명은 요하 일대에서 집중적으로 발굴되고 있어 일명 ‘요하문명’이라 불린다.

환단 시대의 한민족 문화를 자신들의 문화로 둔갑시켜 이제 경제대국에서 문화대국까지 꿈꾸는 것이다.

홍산문화를 황하 문명의 뿌리라 하여 자기네 문화로 둔갑시켰지만, 심정적으로는 동방 한민족 문화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중국 정부는 2000년대 후반, 우하량을 관통하는 4차선 도로를 놓아 유적지를 은폐하였다. 홍산문화가 밝혀질수록 중국이 진행하는 동북공정에 불리해지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유적을 파괴한 것이다.
  
중국이 미래의 중심 국가가 되려는 야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이때, 환단시대를 인정하지 않는 한국의 강단사학자들은 홍산문명에 대해 침묵하거나 우리 역사와 관계없는 것으로 부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 식민사학이 지배해 온 거짓 역사의 미몽에서 깨어나 잃어버린 시원 역사와 문화를 되찾자!

그리고 한민족의 원형문화를 회복하여 웅대한 미래를 열어나가야 한다. 『환단고기 역주』

식민 사관의 감춰진 맨얼굴②

진실의 역사

식민 사관의 감춰진 맨얼굴

식민사학은 비판을 용납하지 않는다. 비판하는 학자를 죽여야만 자신들이 살수있는 ‘제로섬 게임’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인 이병도는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내로 비정해서 한국인의 입으로 일제 식민사학의 고대사 체계를 완성시켜 주었다는 말이다.

실학자 성호 이익은 한사군은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식민사학자들은 고조선 영토를 반도내로 축소하고 고조선의 수도는 항상 평양으로 귀결이 된다.

 

이기백은 고조선이 평안도 일대의 작은 소국이 아니라 만주와 요동요서를 아우르는 대제국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땅이 넓다고 강대국이라는 논리는 낡은 역사관이라며 영토가 광대했던 고조선을 오히려 비판을 한다.

동북아역사재단의 매국, 이적행위는 그 동안 언론에 많이 보도되었다. 그 뿌리는 물론 식민사학이다.

해방 후 한국인들이 받은 역사 교육은 조선총독부 시절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고조선은 미개한 사회라고 가르친 반면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웠다는 한사군은 찬란한 역사로 가르쳤다.

문제는 이런 식민사학자들이 국민들의 세금을 독식해 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식민사학자들은 주로 국고로 운영되는 서울대와 교원대, 그리고 국사편찬위원회와 한국학중앙연구원, 동북아 역사재단 같은 국가 기관을 모두 장악했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은 이기동이다. 동북아 역사재단은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 왜곡에 맞서라는 정책 목표로 설립된 국가 기관이다.

그런데 2012년 경기도 교육청 소속 역사 교사 17명이 「동북아 평화를 꿈꾸다」라는 자료집을 발간하면서

단군 사화를 고조선 개국 신화는 여전히 신화적 범주에 속하며 역사적 사실이 아닌 것이 자명하다며 서술 내용을 바꾸라는 압력을 넣었다.

뿐만 아니라 간도협약이전에 간도가 우리 영토에 편입된 사실이 없다. 백두산 경계비는 국제법적 인식이 등장하기 전이라 내용을 시정하라고 요구했다.

마치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 순사의 눈에 잘 보이기 위해 앞장서서 독립운동가들을 색출하고 고문하던 한국인 앞잡이들의 행태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그대로 반복된 것이다.

 

그러면서 동북아 역사재단은 일본학자들의 역사 왜곡을 바로 잡았다고 언론에 보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행태를 주목하는 학자와 민중 인사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한사군은 버젓이 한반도 내로 기술을 해놓고서 말이다.

그래서 한사군이 만주 서쪽에 있었다는 견해가 어디 있냐고 따지자 말 바꾸기를 시도했다.

이런 기관에 연간 수백억의 국민 세금이 지원되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그냥 동북아역사재단은 중국 동북공정의 한국 지부이자 아베로 대표되는 일본 극우파의 국내 전초기지라고 보면 정확하다.

동북아 역사 재단의 초대 이사장은 김용덕으로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출신이며, 2대 이사장 정재정은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출신이며, 3대 이사장인 김학준은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출신이며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현재 4대 이사장은 김학준 이사장의 제자로서 국제정치학을 전공하고 현대일본학회장을 한 지일파로서 김호섭 이사장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 특별위원회가 교육부로부터 제출받은 '편찬심의회 수당 지급 내역'에 따르면 김호섭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이기동 한국학중앙연구원장 등 교육부가 임명한 16명의 편찬심의위원은 국정교과서 심사수당 5465만원을 받았다.

김학준은 이렇게 말했다.

“돌이켜보면 만주쪽이 다 우리가 지배했던 땅이었다. 이것을 강력히 부르짖은 사람은 5공이었습니다. 5공이 그걸 장려를 했어요. 왜냐하면 쟁점을 돌리려고 애국심에 호소하고 5공이 전적으로 그것을 부채질 했는데 그때 그것에 편승했던 사람들은 학계에서 지금 얼굴을 못 들고 다닙니다.”

김학준의 전력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김학준이 5공 민주화 운동을 한사람으로 오인할 것이다.

그러나 김학준은 5공 시절 12대 민정당 소속 국회위원이었다. 이때 민정당 총재가 전두환이었는데 그 당시 전국구 의원이었다. 자신을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지명해준 전두환에게 갑읍해 90도로 허리를 숙였던 김학준이 5공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후안무치란 말을 아는지 모르겠다.

 

사대주의 유학자나 일제 식민 사학, 서구사대주의자들이 먼저 없애고 싶어했던 대상은 단군이었다.

사대주의 유학자들은 단군을 부정하고 중국에서 왔다는 箕子기자를 우리 민족의 시조로 삼고 싶어했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단군을 조직적으로 말살하고 신화로 전락시켰다.

동북아 역사 재단를 비롯한 한국의 식민사학자들도 단군을 말살하려고 발버둥을 친다.

그러나 이런 식민 사학자들이 해방후 깨끗이 청산되고 상식적인 역사학이 발전했다면 지금쯤 우리는 단군은 말할 것도 없고 고조선이전의 역사를 이야기 하고 있을 것이다.

 

중국은 조선을 의도적으로 없애기 위해 『후한서 동이열전』에서 부여, 읍루, 고구려, 동옥저, 예 등이 각기 다른 나라처럼 기록을 했다.

사실 이 나라들은 고조선내의 제후국들이었다. 으레 중국은 한족외에 다른 이민족을 오랑캐로 폄하를 해서 기록을 하고 자신들이 진 전쟁은 아예 빼버리고 승리한 전투는 부풀리는 식으로 역사를 기록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면서 교원대 역사교수인 송호정은 이미 골수까지 식민사학으로 가득찬 인물인지라 고대 사료자체를 부인하고 들어간다.

한마디로 역사학의 기본 방법론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는 어떻게 하든지 한국사의 강역을 축소하기에 여념이 없는 인물이다.

또한 식민 사학자들의 고질적 병폐는 자신들의 고정관념과 다른 사료들이 나오면 오히려 그시대에 기록된 1차 사료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을 한다.

송호정은 단군을 신화라고 규정짓는다. 삼국유사에도 위서를 인용해서 지금부터 2천년 전에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나라를 세우고 나라이름을 조선이라 했는데 중국의 요임금과 같은 시대라고 기록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송호정은 단군역사를 신화로 만들고 강역을 축소하기 위해 일생을 바치는 사람이다. 국민들의 피땀어린 세금으로 말이다.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1차 사료적 근거가 전혀 없음을 알고 있는 이들은 말투도 아주 단정적으로 기술을 하고 있다.

 

다음 송호정의 글을 보자.

"재야사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우리 건국신화인 단군신화가 실재한 역사라는 입장에서 접근하기 때문에 많은 오해와 오류를 낳고 있다."

그의 논고를 보자.

“단군 조선의 연대는 신화에 나타나 있는 대로를 믿을 수가 없음은 분명하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역사학자가 느낌으로 분명하다라고 전제를 하고 있다. 한마디로 역사학자가 아니라 소설가요, 공상가인 셈이다.

박은식선생은 “나라는 형체와 같고 역사는 정신과 같다”라며 행존 이암선생의 단군세기 서문을 인용했다. 재미 있는 사실은 고조선이 서기전 24세기에 건국되었다는 사료근거대로 고고학을 통해 속속 밝혀지고 있다. 하가점 하층문화에서 발굴된 초기 청동기 문화의 상한 연대가 서기전 2500년까지 올라간다. 그러자 송호정은 ‘고조선식 동검’이 만주일대와 한반도 일대에서 출토되는 사실이 식민사학에 큰 위협이란 사실을 느끼고 새로운 논리를 개발했다. 비파형 동검이 고조선이 아니라 산융. 동호 등의 북방이민족이 만든 것이라는 논리다. 물론 산융, 동호는 고조선의 다른 명칭이다. 중국에서 으레 고조선을 깍아내리기 위해 오랑캐로 기록을 한 것이다. 그렇건만 송호정은 1차적 사료 근거는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이 청동기가 산융, 동호의 것이라고 우기는 것이다. 식민사학은 학문이 아니라 정치논리이다.

 

침략자의 시각에서 바라본 정치논리이며 동북공정의 논리로 바라본 정치논리이기에 대한민국은 이 식민사학을 반드시 정리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 식민사학이 아무런 1차 사료적 근거가 없는 삼류소설임은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다.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는 부여, 비류, 옥저, 신라, 고구려, 옥저, 예, 맥 등 70여 국의 혈통이 단군으로부터 이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조선은 중앙에 천자가 있고 수많은 제후국을 거느린 대제국이었다.

식민사학자들은 청동기는 10세기, 철기는 서기전 3세기에 중국의 한나라에서 들어왔다고 아무 사료적 근거도 없이 우기고 있는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고조선의 제철기술은 서구와 비교할 때 무려 1천년 이상이나 빨랐다. 고조선을 연구할수록 만주일대와 한반도는 물론 산둥반도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국가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그런데 식민사학의 앞잡이들은 고조선이 부여, 예맥, 진번 등과 같은 계통의 한 소국으로 대동강 유역에 건국됐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다가 한중 수교 후 만주 대륙에서 수많은 고조선 유물이 쏟아져 나오자 슬그머니 중심지 이동설을 내놓았다. 물론 아무런 문헌, 고고학적 근거 없이 나온 이론이다. 창작소설인 것이다.

중국기록에 발조선, 숙신으로 기록된 것은 전부 조선의 명칭이다. 이는 정약용, 신채호, 정인보, 리지린 등이 모두 같은 의견을 기술했다. 그러나 송호정은 고조선을 무조건 축소하고 반도북부내로 쑤셔넣기 위해서 숙신은 여진족이고 고조선과 다르다고 주장했다. 고조선을 전공한 송호정은 한국교원대에 재직을 하면서 국민세금으로 고조선 역사 말살하기에 여념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매국 기관인 동북아 역사재단에서 그토록 그를 떠받드는 것이다.

 

자신들의 고정관념과 다른 사료가 나오면 사료가 틀렸다고 한다. 『후한서』에는 평양성을 고조선의 수도 왕험성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응소는 요동군 험독현이 조선왕의 옛 도읍이다"로 기록하고 있다. 조선 사기열전에는 '위만이 왕험성에 도읍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고조선의 옛 도읍에 세운 험독현이 요동군 소속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고조선의 수도가 지금의 평양이라는 논리는 설 곳이 없다. 또한 신찬臣瓚은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樂浪郡故朝鮮國也 在療東(후한서 광무제본기)☞낙랑군은 옛조선국인데 요동에 있다. 高麗治平壤城,本漢樂浪郡王險城,卽古朝鮮也(括理志)

高麗治平壤城,本漢樂浪郡王險城,卽古朝鮮也,時朝鮮王滿據之也(사기정의)☞고려치소인 평양성은 본래 한나라 낙랑군 왕험성인데 곧 고조선의 땅이다. 浿水療東塞外패수요동새외(사기 조선열전)

☞패수는 요동의 새외에서 나온다. 결국 중국 사료를 종합해보면 패수는 대동강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확해진다. 그리고 평양성도 현재의 평양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런데도 한국사를 축소하기 위해 중국과 일본인보다 더욱 우리역사를 반도내로 국한지우고 고조선의 건국사를 대동강 평양으로 비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식민사학자들은 국록을 축내면서 한국사 깍아내리기를 하니 이해할 수가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고조선사를 축소시키고 신화를 만들기 위해 광분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모든 작업들을 대한민국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한다는 것이다. 국민세금으로 먹고 살면서 정작 행위는 대한민국의 역사와 강역을 팔아먹는 매국노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문재인 정부에서 가야사 복원을 지시하고 그동안 동북아역사재단에 대해 문제점을 지적해오던 도종환 의원이 문체부장관으로 지명되자 이들은 본격적 흔들기에 나서고있다. 이번 정권에서 이를 확고히 대청소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