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환단고기와 독립운동사②

진실의 역사

환단고기와 독립운동사

1909년 대영절(3월 16일)에 이기, 나철 등이 단학회를 창립하고 그해 5월 5일에 강화도 참성단에서 천제를 올려 삼신상제님께 이를 고할 때, 계연수도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다. 두 달 후에 이기가 자진하자, 계연수가 그 뒤를 이어 단학회 2대 회장을 맡았다.

 

2년 후인 1911년(48세), 계연수는 스승이 생전에 세세히 감수해 준 『환단고기』에 범례凡例를 지어 붙인 후 드디어 세상에 내놓았다.

범례에 나와 있듯이, 묘향산 단굴암에서 책을 옮겨 편집한 후, 자신의 벗이자 독립운동 동지인 홍범도(1868~ 1943)와 오동진(1889~1944) 두 사람의 자금 지원으로 만주 관전현寬甸縣에서 『환단고기』 30부를 간행하였다.

다음은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일본군의 간도출병과 홍범도에 관한 기록이다. 홍범도의 호걸스런 기풍, 독립군 진영내의 분열상, 그의 전술전략, 한쪽 다리에 관통총상 등이 눈길을 끈다. 그는 청산리 전쟁 중에 총상을 입었던 것 같다.

다음은 홍범도에 대한 기록이다.
우리 민족사에서 홍범도 장군의 항일투쟁을 단순 명확하게 말해보면 가장 먼저, 가장 활발히, 가장 오래 투쟁을 한 우리민족의 영웅이다.
심하게 얘기해서 이순신 장군에 버금갈 정도의 위대한 인물이다. 홍범도 장군은 평양사람이고, 정식 군인으로 평양감영의 나팔수 출신이며, 따라서 정식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당시 나팔수는 오늘날 무전병과 같아 글을 모르고선 절대 맡을 수 없는 보직이다. 어느 책을 보니까, 홍범도 장군을 일자 무식꾼이라고 기술하고 있어 왜곡되게 쓴 책으로 돈벌이하는 사기꾼들이 많다는 것을 말해두고 싶다.

또한 홍범도 장군은 잠시 금강산 초계사에서 스님생활을 했다. 이때 이순신 장군의 적손인 스님으로부터 각종 진법 등을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후 비구스님과 사랑에 빠져 스님생활을 마감하고 함경도에서 두 아이의 아버지로서 포수생활을 하며 지내고 있었고 함경도 삼수갑산을 넘나들면서 명포수로 맹활약을 했다. 이때 험한 속의 날쌘 산짐승을 잡으려면 몇날 몇일을 사냥감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나타나면 협공해서 잡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래서 당시 포수들은 모두가 사격에 관해서 명사수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것도 움직이는 목표물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는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 봉오동 전투가 갖는 역사적 의의는 독립군과 왜놈들 정규군과 정면승부를 한 최초의 전투라는데 있다.

전과는 283중 46명을 사살했고 전멸 시킬 수 있었지만 갑작스런 소나기로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독안에 든 쥐를 놓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왜놈들에겐 하마터면 전멸이라는 치욕을 면하는 순간이었다. 얼마 후 치욕을 씻고자 혈안이 된 왜놈들이 홍범도 부대를 찾고자 헤매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김좌진 부대와 조우해 벌어진 전투가 청산리 전투다.

 

청산리 전투의 시작은 김좌진 부대가 했지만 전투과정에서 김좌진 부대는 왜놈들에게 밀려 쫓기는 위기에 빠졌지만 홍범도 장군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어 무사할 수 있었고 이때 홍범도 부대는 위기에 빠진 김좌진 부대를 도움은 물론 일본군의 협공을 역이용해 일본군끼리 총질을 하게 만들어 청산리 전투의 대미를 장식했다.

 

그러나 훗날 이범석 장군(당시20세)의 자서전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소설처럼 기술해 청산리 전투가 김좌진의 공 인양 만들어 청산리 전투의 진짜 승리자인 홍범도 장군(당시52세)을 역사의 뒤안길로 밀어내는데 일조를 했다.

일제때 배운 학자들로 이뤄진 해방 초기의 역사학계는 이러한 역사 왜곡에 면밀한 연구 없이 인용해 일본군들을 그토록 벌벌 떨게 한 민족의 영웅인 홍범도장군을 역사의 노숙자로 만들었다.

 

이와 같이 항일의병과 독립지사들은 한민족의 오염되지 않은 고유의 역사사서인 환단고기를 읽고 강독을 하며 대한독립과 아시아 평화를 위협한 제국주의에 강력히 항거한 것이었다.

역사관이 부족한 그들이었다면 과연 생사를 넘나드는 전장에서 혼을 바쳐 나라를 되찾으려 했겠는가.

그 당시도 일명 지식인이었던 많은 배운자들은 역사관이 부족한 시대조류에 편승해서 사대주의에 기대어 일본을 믿고 그들 편에 섰다.

바로 이 독립운동사를, 해방 후 친일세력이 득세를 하면서 거의 독립운동사를 가르치지 않거나 철저히 왜곡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독립운동을 했던 정신적 기반마저 신화로 치부되어 환단고기는 한낮 독립운동가들의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서 조작된 사서로 몰아 붙였다.

 

이리하여 그들의 원래 보급이 없던 독립군으로서는 교포의 큰 부락을 만나지 못하면 거의 몸에 지녔던 소금 섞은 좁쌀가루로 굶주림을 달래지 않을 수 없었고, 때로는 강냉이나 날밀떡, 호박 같은 것도 구할 수 없어서 세 네 끼씩 굶기가 일쑤였다.

그러면서도 백 여근의 무장을 몸에 걸치고 하루에 백 수십리 길 험산 황야를 가로질러 강행군하면서 피가 튀는 치열한 전투까지 치루었던 것이다. 그 배고픔, 그 추위, 그 투지가 아직 숨소리의 갈피엔 배여 있다. 어찌 내 이를 잊을 수 있으랴!


영하 삼 사십도의 혹한에 눈산이 부서져 나리는 듯한 눈보라 속에서 비록 때 늦게나마 면군복(솜군복)을 입게 되는 것은 천만다행의 행운이었던 일인저! 그뿐이랴. 중상한 전우가 자살을 택하지 않을 수 없는 처절을 눈 앞에서 목도해야 했고, 경상자에게도 소독약 한 번 써본 일이 드물었다.

범례에서 계연수는 “환단 이후로 계속 전수되어 온 삼일심법三一心法(태고 시대 동방의 우주사상의 핵심)이 진실로 이 책 속에 들어 있으니, 동방 대광명의 참 진리가 중흥하는 기틀이 아니고 무엇이랴! 손발이 절로 춤추며 흥겨워 외치고 싶고 기뻐서 미칠 듯 하도다!”라고 벅찬 심정을 토로했다.

 

발간 의의에 대해서도 “우리 자신의 주체성을 발견하게 되었으니 크게 축하할 만한 일이요, 또한 민족 문화의 이념을 표출하게 되었으니 크게 경축할 만한 일이며, 또 한편으로 세계 인류가 대립을 떠나 공존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으니 더욱 경축할 만한 일이다”라고 밝혔다.

 

1914년(51세) 대영절에 계연수는 단학회 동지들과 평안도 삭주 천마산에서 천제를 올리고 혈맹을 맺어 ‘역사 회복 운동을 통한 구국운동’을 다짐하였다.

이듬해 10월 단학회의 근거지를 만주로 옮기면서 관전현 홍석랍자紅石拉子에 배달의숙倍達義塾이라는 교육기관을 열어 청년 학도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단체인 천마대天摩隊,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의민사義民社, 벽파대碧波隊, 기원독립단紀元獨立團 등에 속한 단원들의 사상적 계몽에 주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단학회가 결성된 지 10년이 지난 1919년 3월부터 기관지 <단학회보>를 간행하기 시작하여 제8호까지 발간하였다.

『환단고기』를 간행한 후 역사 회복뿐 아니라 항일 독립운동에도 적극 참여하던 계연수는, 조선인의 민족혼 말살과 역사 파괴에 혈안이 된 일제가 검거할 제1순위 대상이었다.

결국 계연수는 1920년(57세) 조선독립군으로 위장한 밀정의 덫에 걸려 무참히 살해되었다.

일제는 그의 사지를 절단하여 압록강에 버리고 배달의숙 건물에 불을 질러 계연수가 소장하던 3,000여 권에 달하는 서적과 원고를 모두 태워 버렸다.

조선이 일본 제국의 흉포한 야욕에 나라를 완전히 빼앗기고 절망의 벼랑 끝에 서 있던 그때, 인류의 창세사와 한민족의 9천 년 국통 맥을 총체적으로 드러낸 ‘국사학의 아버지’ 계연수는 이렇게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유교사대주의 노선을 걸었던 조선시대에는 환단의 역사를 숨겨서 전수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운초 계연수 선생이 내려오던 한민족 고유사서를 환단고기로 합본하면서 우리 상고사가 전수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우리 상고사가 고스란히 실린 환단고기는 독립운동가들의 사상적 기반이었다.

최근 식민사학계와 그에 동조하는 세력과 언론에서 환단고기를 ‘환빠’로 매도하는 이유는 환단고기가 살아나는 만큼 독립운동사가 살아나고 해방 후 현대사의 주도권을 쥔 외래사대주의자들과 친일파, 그리고 친일식민사학자들의 치부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환단고기』를 죽여야만 자신들이 사는 것이다.

결국 찬란한 선조들의 역사를 죽이는 매국행위를 해야만 자신들의 부귀를 지속할 수 있는 것이다. 『환단고기 역주』

환단고기와 독립운동사①

진실의 역사

환단고기와 독립운동사

천 년의 세월에 걸쳐 쓰인 다섯 권의 사서를 한 권의 『환단고기』로 묶은 인물은 바로 1864년 평안도 선천에서 태어난 운초 계연수(1864~1920)이다. 자신의 집안에서 보관해 오던 책과 지인들로부터 구한 책을 한 권으로 엮어 편찬한 것이다.

 

안함로의 『삼성기』는 운초의 집안에 전해 오던 것이었고, 원동중의 『삼성기』는 태천에 살던 백관묵白寬默에게서 구하였다. 『단군세기』 또한 백관묵의 소장본이고, 『북부여기』는 삭주 뱃골 사람 이형식李亨植의 소장본이었다. 『태백일사』는 운초의 스승인 해학 이기李沂의 집안에 전해 오던 것이었다.

 

백관묵(1804~?)은 문재로 이름이 높은 명문 집안 출신으로 헌종 6년(1840) 식년시式年試에 진사로 합격하였고 많은 책을 소장하고 있었다.『백관묵의 집안은 대대로 학자 집안이었을 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 때 그의 아들과 손자들은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

일간지 <문화경제신문>의 기사에 따르면, 아들 백삼규白三圭(1855~1920)는 유학자이자 의병장이었다. 백삼규는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을 계기로 의병 운동을 시작하여, 1910년 경술국치 후 큰아들 인해仁海를 데리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농무계農務契와 환인계를 조직하여 애국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지도하였다.

1919년에는 대한독립단을 조직하고 부총재에 추대되었으며,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보민회保民會, 일민단日民團, 강립단强立團 등을 숙청하는 활동을 벌이다가 이듬해 일본군에게 붙잡혀 총살당하였다. 백삼규의 장남 인해도 독립단에 가입해 활동하던 중 1921년 불심검문에 걸려 격투 끝에 순국하였고, 그 후 둘째 인제仁濟도 순국하였다.

삼부자가 모두 일제에게 희생되어 구국의 충혼으로 승화한 것이다.<문화경제신문>, “화서학파華西學派 인물열전” 246회, 2011.4.9.

 

그리고 이형식은 1796년생으로 백관묵과 같은 해에 식년시 생원과에 합격하였다. 계연수가 이형식을 생원이 아니라 진사라고 부른 것은 그의 부친 이사겸李嗣謙이 진사로 합격한 내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형식 소장본에는 『단군세기』도 합본되어 있었는데, 그 내용이 백관묵의 『단군세기』와 동일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환단고기』가 탄생하기까지 백관묵과 이형식을 비롯한 많은 사람의 공덕이 있었지만, 특히 계연수와 이기의 혈성과 희생이 컸다.
이기(1848~1909)는 전라도 만경 출생으로 정약용의 학통을 계승한 실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다.

15세 때 향시鄕試에 나가면서 뛰어난 재주와 명성이 여러 고을에 알려졌다. 이기는 당시 유명한 선비들과 교유하였는데,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1840~1910),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과 더불어 ‘호남의 삼재三才’라 불리었다.

 

이기의 문장에 대해 이정직은 “대개 백증(이기의 자)의 글은 쓸데없는 글자나 구절이 없어서 마치 꽃 중의 꽃이요, 곡식의 자양분과 같고, 따뜻하고 윤기가 있으며, 법도에 맞고 아담하다”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이건창李建昌(1852~1898)은 “백증의 문장은 수를 놓은 비단이다”라고 평하였고, 황현도 “씩씩하고 뛰어나며, 뛰고 달리는 기운이요, 특출하게 아름답고 박학한 문장이다”라고 칭찬하였다.

 

성리학과 실학을 모두 섭렵한 이기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였고, 저항의 일선에서 애국 활동을 하였다.

1894년(고종 31)에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동학군 최고 지도자인 전봉준을 찾아가서 ‘동학군을 이끌고 한양으로 올라가 간사한 무리를 물리치고 임금을 받들어 국가의 질서를 새롭게 하자’는 뜻을 전했다. 전봉준은 이기의 뜻에 호응하여 남원에서 동학군을 지휘하던 김개남과 협의하도록 하였으나 협의는 실패로 돌아갔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노골적으로 조선에 침투해 오자 농민생활의 안정과 국권을 회복하는 데에는 토지개혁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여, 서울로 올라가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 어윤중魚允中을 만나 토지제도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뒤, 전후戰後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강화회의미국 포츠머스에서 열릴 때, 이기는 동지들과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의 독립을 보장해 달라는 호소를 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여권이 나오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미국행에 실패한 이기는 동향 후배이자 동지인 나인영羅寅永(나철羅喆, 1863~1916)을 비롯한 몇 명의 독립운동가와 그해 8월 일본으로 건너가 일왕과 일본 정계 요인들에게 조선 침략을 규탄하는 서면 항의를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적 투쟁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그해 11월 소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12월에 귀국하여 서울에 머물던 이기는 곧 이어 모친상을 당해 귀향하였다. 그러나 국권이 기울어지는 위급한 시기였으므로 ‘상복을 벗어버렸다’는 비난을 무릅쓰고 다시 상경하여 한성사범학교 교관으로 들어가 후진 양성에 진력하였다.

또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고 월보를 발행하여 국민 계몽에 앞장섰다. 이기는 교육의 목적을 국권 회복에 두고, 교육을 통하여 자강自强, 자급自給으로 실력을 길러 나라를 지키자고 주창하였다.

 

1907년에는 육순의 나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인영, 오기호, 윤주찬, 김인식 등과 을사오적乙巳五賊 암살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계획이 실패로 끝나 7년의 유배형을 받고 진도로 귀양을 갔다.

다행히 2년 후에 석방되어 서울로 돌아온 이기는 『호남학보湖南學報』를 발행하고, ‘단군 성조의 얼을 기리고 고조선의 역사를 부흥시키자’는 취지로 단학회檀學會를 조직하여 계몽운동과 구국운동을 계속 펼쳤다.

하지만 끝내 국세가 기울자 1909년 7월 13일 서울의 한 여관에서 절식絶食으로 62년의 일생을 마쳤다.

 

이기의 생애에서 특히 시선을 끄는 것은, 이기가 『단군세기』를 쓴 이암과 『태백일사』를 쓴 이맥(이암의 현손)의 후손이라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이기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역사서를 읽었고, 우리 고대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쌓게 되었다.

그가 계연수에게 전해 준 『태백일사』도 집안의 가보家寶로 전해오던 것이다.

이러한 이기를 스승으로 모셨기 때문에 계연수는 『환단고기』를 발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계연수에 대한 기록은 『해동인물지』(1969)와 『정신철학통편』(1920) 외에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계연수의 간략한 생애가 기록된 『해동인물지』에 따르면, 계연수의 자는 인경仁卿, 호는 운초雲樵이고 평안도 선천에서 살았으며, 이기의 문하생이 되어 백가百家의 책을 섭렵한 후 무술년(1898)에 『단군세기』와 『태백유사太白遺史』 등을 간행하였다.

기미년(1919)에 임시정부의 이상룡 막하에 들어가 참획군정으로 공을 세우고 경신년(1920)에 만주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정신철학통편』은 계연수가 묘향산에서 석벽에 새겨진 『천부경』을 발견한(1916)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지난 30여 년 동안 안경전 역주자는 『환단고기』를 연구하고 서지학적 정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현 단단학회檀檀學會 회장인 양종현(1948~ )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를 통해 계연수의 실체를 좀 더 분명하게 파악하게 되었다.

 

양종현은 『환단고기』의 전수자인 이유립의 증언을 바탕으로 계연수의 생존 당시 모습을 초상화로 그려 소장하고 있었다.

양종현씨는 환단고기가 이유립선생의 창작이라는 강단 식민사학의 음해에 대노를 했다.

그는 공부를 할 때 끌로 판 목판 인쇄본의 글자를 한 글자씩 짚어가며 스승님과 같이 공부를 했다고 확고하게 증언하고 있다.


계연수는 1864년에 평안도 선천에서 태어났다. 일찍 부모를 여의었는데,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한 번 보면 곧바로 외울 만큼 기억력이 뛰어났다. 동방 한민족의 옛 역사와 민족정신에 관심이 지대했던 그는 27세(1890) 때까지 약초를 캐어서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여러 양반가와 사찰에서 비장하던 서책과 금석문, 암각문 등 각종 사료를 수집하였다.

한민족의 역사를 밝히고자 한 계연수가 뜻을 이룰 수 있게 된 결정적 계기는 해학 이기와의 만남이었다.

1897년(34세)에 이기의 문하에 들어간 계연수는 스승의 가르침 아래, 그로부터 두 해 동안에 이암의 『태백진훈』과 『단군세기』 그리고 『참전계경』, 『태백일사』, 『천부경요해』 등을 간행하였다. 『환단고기 역주』

친일파와 독립투사

진실의 역사

친일파와 독립투사
한국 역사상 가장 극단적 사대파는 바로 친일파였다.

이들은 조선에 지켜야 할 좋은 가치가 아무것도 없다고 보았다.

유일한 살 길은 조선인의 정체성을 버리고 선진국인 일본에 철저히 동화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친일파들은 자발적으로 일본의 침략을 도왔으며 일본이 패망하는 날까지 열렬히 일본에 충성했다.

하지만 모두가 친일파의 길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일본에 동화되기를 거부했으며, 외세의 지배를 받지 않는 자주적 조선인만의 나라를 만들려 일본과 친일파와 맞서 싸웠다.

그들이 바로 독립투사였다.

 

500년을 넘게 이어져 온 조선왕조는 1910년에 일본에 주권을 빼앗기고 멸망한다.

조선이 망한 원인을 두고 여려가지 주장이 있으나, 주요한 원인 중 하나는 구한말 조선 무렵 조선 지배층 내부에서 일본과 결탁한 친일파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근대적인 새로운 문물을 소개한 계몽기관이자 언론사로 알고 있는 ‘독립협회’‘독립신문’은 사실 일본과 결탁한 친일조직이었다.

애초에 독립협회와 독립신문 자체가 일본 외무대신과 주한 일본 공사같은 일본의 정부기관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만들어진 단체였으니 짐작할만하지 않은가?

일본이 제공한 자금으로 만들어진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은 일본을 열렬히 찬양하는데 열을 올리며, 조선인들 사이에 친일여론을 퍼뜨리는데 주력을 다했다.

고종34년(1897년) 114호자 《독립신문》에는 “사악한 청나라가 조선에서 쫓겨난 것은 하늘이 조선 백성에게 베푼 은혜”이며,

고종35년(1898년) 별호에는 “조선은 일본의 화폐를 그대로 사용해야 한다”라는 논설이 실렸다. 

《독립신문》은 조선이 자국 국방을 갖추려는 움직임을 방해하는 음해도 서슴지 않았다.

고종 황제가 2척의 군함을 외국으로부터 들여오려는 계획을 세우자 “세계 모든 나라들이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는데 무엇하러 군함을 들여 오는가? 군대는 그저 도적떼나 평정할 정도의 소규모만 있으면 된다”라고 극렬히 반대했다.

《독립신문》의 논지대로라면 조선은 일본의 화폐를 그대로 쓸만큼 경제가 일본에 종속되고, 자주 국방을 위한 국비 증강도 하지 말아야 했던 셈이다.

아울러 독립신문은 일본에 맞서 싸우는 조선 의병들을 가리켜  비도匪徒(도적떼)라고 모욕을 하는가 하면, 조선 침략에 열을 올리는 이토히로부미와 내통하던 이완용을 불세출의 천재이자 애국자라고 찬양을 했다.

이런 《독립신문》이야말로 친일 사대주의 언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독립협회 역시 친일 행각으로는 독립신문에 뒤지지 않았다.
러시아가 일본과 대립하자 독립협회는 반러시아적인 모습을 보이며 고종황제를 압박했다. 

고종이 러시아의 협조를 받아 4000명의 장교와 3만명의 병사로 조직된 근대식 군대를 창설하려 하자,

독립협회는 고종에게 조선이 군비를 증강하는 것은 일본에 대해 적대적인 의도를 품은 일이 아니냐며  협박을 했다.

독립협회는 연일 러시아를 비방하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군중을 선동하여 고종을 몰아내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말로는 ‘독립’을 내세웠으나,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는 사실 일본에 종속되기를 원한 위선적인 친일파 조직이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토히로부미가 조선에 보낸 첩자이면서 고종의 측근이었던 배정 같은 경우도 있었다.

김해 고을에서 아전 노릇을 하던 배지홍의 딸로 태어난 배정자는 아버지가 역모에 휘말려 죽자 일본으로 달아났다.

배정자는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 그의 첩이 되면서 자기 아버지를 죽게 한 조선을 증오하여 반드시 망하게 만들겠다는 결심을 실행하게 된다.

배정자는 조선으로 돌아와 상류층 인사들과 어울리면서 친분을 쌓고 뛰어난 미모와 유창한 일본어 실력으로 고종의 환심을 사서 그의 측근이 되는데 성공한다.

조선 지배층 깊숙이 침투한 배정자는 조선에서 일어나는 고급 정보들을 전부 일본으로 넘겨주었다.

 

고종이 일본의 손길을 피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려던 일이 도중에 무산된 것도 배정자가 그 사실을 알고 일본 공사관에 정보를 전해주어, 일본이 손을 써서 고종의 망명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1907년 고종이 네덜란드 헤이그에 일본의 주권 침탈을 폭로하려 밀사들을 보냈던 헤이그 밀사사건도 배정자의 밀고로 인한 내부 기밀 누출로 인해서였다.

이로 인해 고종은 황제의 자리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배정자처럼 자발적인 친일 사대 매국노로 활동하며 악명을 떨친 일진회도 빼놓을 수 없다.

약 4000명의 회원으로 조직된 일진회는 독립신문처럼 친일 여론을 퍼뜨리는 한편, 회원들에게 군사 훈련도 시켰는데 이는 일본군을 도와 항일 의병들과 싸우는 전투에 적극 가담시키기 위해서였으며 실제로 그렇게 했다.

이들이야말로 구한말에 활개치던 가장 악독한 친일 사대 매국노들이었다.

일본에 외교권을 넘긴 을사늑약을 체결하는데 동참한 이완용과 송병준 같은 조선의 고위 관리들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이완용은 을사늑약 이후, 아들을 일본에 유학을 보내면서 "장차 50년 후, 일본에 조선인 출신 재상이 나올 줄 누가 알겠느냐?"라는 말을 남겼다.
이렇게 조선 권력층 내부에 일본과 내통하는 친일파가 가득 했으니, 조선이 망하지 않을 도리가 있었겠는가?

 

아무리 항일 의병들이 무기들 들고 일어나 일본군에 맞서 싸운다고 해도, 친일파가 그 정보를 모조리 일본에 보고하는 상황이니 임진왜란 때와는 달리 의병들의 항일 투쟁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본 반역자인 친일파들을 정신병자나 패륜적인 악마로 보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은 고등교육을 받은 엘리트 지식인이었다.

형세의 이익을 계산한 이들은 “조선은 존속할 가치가 없으니 빨리 망해서 일본에 흡수하는 일이 옳다”라는 잘못된 믿음을 가진 확신범들이었다.

구한말 배웠다는 상류층 위정자들은 나라를 팔아먹고 민초들은 의병으로 거사를 하여 독립투사가 되었던 것이다.

물론 깨어있는 지식인 중에 일제에 항거한 훌륭한 지사들도 많았다.

또한 무지렁이 민초들 중에도 눈앞에 이익에만 급급하여 친일을 서슴지 않고 한 자들도 많았었다.  

 

오늘날 친일파와 가장 닮은 사람들은 입만 열면 “한국은 이래서는 안 된다. 선진국이 하는 대로 본받아야 한다”라며 세계주의를 가면 쓰고 자국 혐오와 사대주의적 발언을 일삼는 지식인이다. 만약 이들이 구한말이나 일제강점기에 활동을 했다면, 아마도 대부분 자발적으로 열렬한 친일파가 되지 않았을까. 『자주파 VS 사대파』

 

일제의 민족종교 말살책과 독립운동

진실의 역사

일제의 민족종교 말살책과 독립운동

 

한민족은 지난 1세기 남짓 동안 엄청난 역사의 횡포에 시달려 왔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경쟁적 횡포에 농락당하고, 이어서 나라를 빼앗기고 일제의 식민지 통치하에 들어가는 역사적 치욕을 당했다.

식민통치에서 해방은 되었지만 곧 민족은 분단으로 귀착되는 비극을 맞이한다.

그리고 6.25라는 민족상쟁의 아픔을 겪게 된다.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통일을 맞이하게 되겠지만 불행하게도 그 통일은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를 포함한 국제 세력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진행되고 있다.

따라서 일제의 강점기에 조작된 식민사학과 해방이후에 우리문화와 역사를 배타적 시각으로 바라본 외래종교의 사대적 시각을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통일이 진행되면 우리의 민족은 극도의 사회혼란과 분열만을 조장할 것이다.

 

열강들의 잇권노름으로 시작된 일제의 한반도 강점은 그만큼 우리민족의 현재와 미래를 돌이킬 수 없는 불행으로 몰아넣은 대사건이었다.

이러한 국권 상실의 운명 앞에 민족종교는 후천개벽사상을 주창하며 미래의 희망과 확신을 표출한다.

이는 역사의 횡포에 민족의 희망과 열망으로 분연히 일어난 민족종교의 핵심 사상이었다.

그 효시가 1860년 최제우가 일으킨 동학이었다.

보국안민의 기치아래 민족종교는 당연히 격렬한 항일운동의 정신적 주체가 되었다.

갑오동학혁명, 3.1운동, 그리고 만주에서의 항일독립운동 등과 같이 한국 근대사의 주요한 사건들은 모두 후천개벽사상과 보국안민의 사상적 기치아래 전개되었던 운동이었다. 이처럼 민족종교는 민족주체의식의 사회적 실체였다.

 

그러므로 조선 총독부는 민족종교를 민족정기의 온상이며 항일정신의 핵심으로 간주하고 탄압을 가했다.

오직 순수한 민족애와 민족 정체감만이 천도교, 불교, 기독교 같은 특정종교의 세계관에 구애되지 아니하고 한민족을 하나로 묶을 수가 있었다. 가령 유교,불교와 같이 오래된 외래종교라 해도 그 사상이 우리민족 정체성의 핵심을 반영하지 못하고, 우리나라에서 역사가 일천한 기독교는 아직 민족문화 전통의 정서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였다.

민족종교는 망국의 한에 빠져있는 국민에게 커다란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으며, 민족의 통합에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이러한 사실을 간파한 일제는 민족종교의 탄압을 가속화 했다.

 

민족종교가 일제치하에서 독립과 민족정신의 회복을 기도했다면 일제는 민족종교를 말살했다.

양자는 첨예한 대립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정책적 의도에 의하여 설정된 개념의 범주 안에서 아직도 우리사회가 민족종교를 이해하고 있다면, 아직도 일제의 식민지배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충격적 사실을 입증하는 것일 뿐이다.

한국 민족종교를 신흥종교, 유사종교 또는 사이비종교, 심지어는 사교라는 용어로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이 오늘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관행이다.

이러한 개념들이 사용되기 시작한 역사적 시대가 바로 일제시기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서양으로부터 시작된 제국주의 정책은 타문화에 대해 일방적 통행을 강요했다.

우리의 전통가치는 근대화라는 명목하에 멸시되었고 파괴되었다.

역설적이지만 서양사상과 종교가 합리적이라는 근거는 더 더욱 없었다.

과학발전은 오히려 서양종교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가고 있었다.

그동안 역사적으로 본다면 깨어난 과학자들이 하나님의 신권에 도전한다는 명목하에 탄압을 받았던 사실을 알아야 한다.

서구를 깨운 것은 중세의 신권사회에서 부터의 이탈인 르네상스였다.

오히려 서구의 근대화란 탈신권주의의 각성으로부터 출발한 것이었다.

근대화란 서양화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동안 발전의 모델인 서양을 모방하다 보니까 서양의 종교는 합리적이고 다른 종교는 비합리적인 태도로 대응을 해왔다.

일제는 우리문화는 온통 미신으로 매도해 놓고 자신들은 아직도 수많은 신을 모시는 신도(신사)문화를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일제의 위장된 문화정책은 큰 효력을 발휘하였다.

민족종교에 대한 이런 냉소적 태도는 불과 반세기 전 일제하에서 우리민족이 겼었던 수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데서 비롯되었다.

더군다나 일제하에서 민족종교가 어떤 역사적 사명을 감당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데서 기인한다.

 

그만큼 우리사회가 우리역사를 왜곡한 것만큼이나 민족의 정신의 산물인 민족종교 역시 철저히 곡해되어 왔던 것이다.

민족종교에 대한 잘못된 일차적 이해는 일제의 식민지 문화정책에서 비롯된다.

일본총독부는 처음부터, 천도교, 대종교, 증산교(보천교) 등 사회적으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한국민족종교들을 종교로 인정하지 않았다 .

다만 이들을 종교와 유사한 단체라는 뜻에서 유사종교, 또는 사이비종교로 규정했다.

이처럼 민족종교는 처음부터 존재를 거부당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일제는 정략적으로 민족종교를 거세시켰던 것이다.

일제시대에 공인된 종교는 일본의 신도, 불교, 기독교만이 공인되고 그 외의 종교는 종교로 인정을 하지 않았다.

이는 식민지정책을 수행하는데 매우 효과적이고 편리했다.

민족종교는 경계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한국의 민족종교는 사회에서 제거해야할 단체로 취급되었다.

슬픈일이지만, 해방이 된지 오래건만 노예적 사관에 사로잡혀 일제가 만들어 놓은 이 개념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서구 열강과의 외교관계를 고려해서 오히려 장려를 하였다.

식민지국가에서 민족종교가 기댈 수 있었던 세력은 오직 한국 민중이었다.

그러나 식민지의 민중역시 총독부의 수탈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민족종교는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무자비한 탄압정책에 희생되어 만신창의가 되었다.

그러나 해방이후에도 우리나라는 친일파들이 실권을 쥐면서 오히려 민족사학자와 독립운동가들을 빨갱이로 몰아서 숙청을 했다.

국권을 잃은 민족에겐 힘없는 국가의 민족정신을 철저히 짓밟히는 고통이 뒤따라야 했다.

식민지 조선의 사상과 가치 종교,역사 모두 철저히 멸시되었다. 국가와 민종종교는 외세 앞에 철저히 유린당했다.

 

일제의 식민정책에 의해서 철저히 유린당하고 희생된 한국 민족종교의 비극적인 역사를 우리는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는가.

피해자가 무능하다고 봐야할 것인가.

아니면 약육강식의 논리대로 가해자는 신이 자신의 편을 들어주었다고 승리의 찬가를 불러야 하는가. 가

치관이 결여되고 도덕적으로 무감각한 지금의 일본의 아베정권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는가.

건강한 가치관에 의해서 일관되고 통일된 도덕적 태도만이 과거의 잘못을 진심으로 사과할 줄 아는 용기를 갖게 한다.

과거 역사의 올바른 교정은 자기를 반성하는 용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 국민은 용기 없는 가해자를 만난 불행한 처지에 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상대방을 의도적으로 위해하는 악의적인 가해자를 역사에서 다시 나타나지 않도록 공동으로 노력을 해야 한다.

인간지성은 인간사회에서 단순피해자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명령한다.

인간의 양심은 정의를 지향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 신은 정의의 편이기 때문이다.

강자가 되는 것이 하늘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성자들의 가르침에서도 마찬가지로 지적하고 있다.

유대율법과 로마강권에 항거한 해방자로서의 예수의 삶, 부귀를 버리고 불성을 회복하라는 부처의 삶, 인의를 바탕으로 한 대인군자의 삶을 살으라고 했던 공자도 역시 패권놀음에서 벗어나 본질을 지향해라 했다.

그러나 그 사상을 믿는 사람들은 성자들의 가르침을 잃어버리고 패권놀음의 하수인이 되어 버린 안타까운 현실이다.

지나온 일류역사를 돌이켜 보건데 종교역사도 제국주의 패권역사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강대국의 종교패권을 약소국에 행사하여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지배하려 했던 것이다

올바른 인간, 참된 가치관 등 그동안 인류가 지향해온 숭고한 가치가 일반적 상식이 되는 사회가 되려면 사회 구성원들의 양심과 성숙된 인격이 필수 조건이다.

『일제의 한국 민족종교 말살책』

 

 

우리는 왜 잃어버린 역사를 꼭 알아야 하는가?

진실의 역사

 

 

"역사를 잃어버린 자 역사에 휩쓸려 가리라."라는 명언이 있습니다.

 

한민족의 근세사를 보면, 마지막 조선 왕조가 몰락의 위기에 내몰리던 무렵, 고종황제는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꺼져가는 국운을 다시 일으키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노력은 13년 만에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무너지고 맙니다.

 

이후 일본 식민통치 35년 동안, 환국-배달-단군조선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의 상고사는 모두 말살되었고, 약 8백만 명이 무참하게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오늘의 우리는 왜 잃어버린 역사를 꼭 알아야 하는가?

왜 우리 한국 문화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역사를 잃어버리면 과거를 알 수 없고 과거를 모르면 현재 사물을 보는 눈이 뒤틀려서 제대로 미래를 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역사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민족의 패망과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잃어버린 역사를 찾으려 하지 않고

"그게 뭐가 급하냐? 나는 관심이 없다."하는 한국인은 진정으로 바보같은 사람입니다.

대한민국이 세계 경제 10위 대국의 문턱을 넘어섰다고 하지만, 지금 이대로라면 마치 사상누각과 같아서 우리의 장래를 보장할 수 없습니다.

 

환단고기 단군세기 서문을 보면 역사와 국통國統의 중요성에 대한 글이 있습니다.

"나라는 국통으로 인하여 세워지고, 백성은 이 국통으로 인해 흥하였나니, 역사를 배움이 어찌 소중하지 않으리오?"

 

한민족의 태고시대 인류 창세 문화와 역사를 개창한 동방 문화의 주역입니다.

대한민국이 세계 속에서 당당하게 서려면 시원 역사를 복원하고 국통맥을 바로 세워 잃어버린 민족혼을 회복해야 합니다.

 

모든 생명은 뿌리 기운으로 태어나 매순간 뿌리 기운으로 살고 열매를 맺습니다.

따라서 뿌리를 부정하는 것은 생명의 근원을 거부하고 잘라내는 일입니다. 그것은 결국 소멸이 있을 뿐입니다.

 

국가와 민족도 그렇습니다. 뿌리 역사를 잃어버리고 국조를 부정하면 영원한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역사의 근원과 뿌리를 송두리째 잃어러비린 한민족의 역사 광복운동이야말로 진정한 독립운동이요 구국운동입니다.

 

나라는 1945년에 해방되었으나 한국의 창세 역사와 원형문화는 아직 식민시대의 어둠 속에 갇혀 있습니다.

마지막 역사혁명이자 진정한 독립운동은 지금부터입니다.

 

모두 대한사람으로 거듭나 지구촌 전 인류가 한 가족으로 살아가는 희망의 새 시대를 여는 자랑스러운 역사의 주인공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