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청일전쟁'에 해당되는 글 2건

  1. 을미지변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
  2. 환단고기와 독립운동사①

을미지변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

진실의 역사

을미지변乙未之變,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弑害

 

하루는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조선은 원래 일본을 지도하던 선생국이었나니 배은망덕(背恩忘德)은 신도(神道)에서 허락하지 않으므로 저희들에게 일시의 영유(領有)는 될지언정 영원히 영유하지는 못하리라.” 하시니라. -도전 5편 118장

작전명 ‘여우사냥’이 시작됐다.

1895년 새벽 5시경 광화문 앞에 일단의 일본인 낭인浪人들이 일본군 수비대, 조선 훈련대와 함께 도착했다.

이들은 이미 새벽 3시경 공덕리孔德里의 별장(아소정我笑亭)에 유폐되어 있던 대원군을 강제로 끌어내어 궁으로 향했다. 대원군과 훈련대를 끌어들인 것은 향후 사건을 조선인들에 의한 반란으로 조작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그들이 노리던 목표는 조선의 왕비 민씨(사후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로 추존, 이하 ‘황후’로 칭함)였다.

사건은 이미 오래전에 치밀하게 준비되었다.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부부는 사건이 있기 한 달 전 일본을 다녀온 후 왕궁을 방문하여 조선 왕실의 안전을 확보한다고 약속하면서 9천 원에 상당하는 선물을 고종과 황후에게 바쳤다. 일본에 대한 고종과 황후의 경계심을 풀기 위한 계산된 연극인 셈이다.

 

또한 일본은 고무라의 딸을 황후의 양녀로 들여보냈는데 이는 황후의 얼굴과 궁궐의 지리를 익히기 위한 사전 포석이었다.

황후 시해 계획을 세운 이노우에는 사건 발발 20일 전에 일본으로 돌아가고, 그를 대신하여 이노우에가 추천한 육군 중장 출신의 미우라 고로(三浦 梧楼)가 1895년 9월 1일 부임했다. 행동 대장 이노우에의 주도하에 10월 3일 공사관 밀실에서 을미지변乙未之變의 구체적 실행을 위한 모의가 이뤄졌다.

 

낭인 일행이 도착하자, 광화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일본 수비대는 경비병과 순검들의 저항을 가볍게 제압했다.

광화문이 열리자 일본군은 함성을 지르며 북쪽의 건청궁乾淸宮을 향해 돌진했다. 궁을 지키던 300~400명의 시위대가 총격전을 벌였으나, 이미 갑오경장 때 우수한 무기를 빼앗겨 일본군을 당할 수가 없었다. 흉도들은 건청궁까지 오자 대오를 정렬하여 합문을 포위하고 파수를 보았으며, 낭인 자객들은 전당으로 들어가 밀실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흉도들은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명성황후의 처소를 대라고 윽박질렀다.

 

마침내 건청궁의 안채 곤녕합坤寧閤에서 황후를 찾아냈다. 흉도들은 황후를 내동댕이친 후 발로 짓밟고 여러 명이 칼로 찔렀다. 흉도들은 자신들이 죽인 여인이 황후라는 것을 정확히 알지 못하여 황후와 비슷한 용모의 세 궁녀들도 살해했다. 이들은 이미 황후의 얼굴을 그린 초상화를 여러 장 들고 있었고, 나중에는 고무라의 딸을 대동하여 황후인지를 확인하였다. 그것도 미심하여 최종적으로 태자를 불러 황후의 죽음을 확인했다.

 

「고종실록」에는 황후가 죽은 시각은 묘시卯時라고 되어 있다. 대략 새벽 6시경이었다고 한다. 황후의 시신은 그날 아침 궁에 들어온 미우라 공사에 의해 재확인되고, 그의 지시에 의해 화장되었다. 아예 증거를 인멸하기 위함이다. 흉도들은 시신을 문짝 위에 올려놓고 이불을 덮어 건청궁 동쪽 녹원鹿園 숲 속으로 운반한 다음 장작더미에 옮겨 놓고 석유를 뿌려 태웠다.

타다 남은 유골은 날이 밝은 뒤 훈련대장 우범선이 궁궐을 순시하다가 발견하여 연못에 넣으려고 했으나, 훈련대 참위 윤석우尹錫禹가 혹시 황후의 시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이를 수습하여 멀리 떨어진 오운각 서봉西峰 밑에 매장했다. 어떤 일본 측 보고서에 의하면 흉도들은 황후의 시신에 능욕을 가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고 한다.

 

이때 고종은 흉도들의 주의를 따돌려 황후의 피신을 돕기 위해 밀실의 뒷문을 모두 열고 흉도들이 잘 보이는 방문 앞에 나와서 있었는데, 흉도들은 칼을 휘두르며 그 방에 들어가 고종의 어깨와 팔을 끌고 다니기도 하고 고종 옆에서 권총을 쏘고 궁녀들을 난타하며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태자도 다른 방에서 붙잡혀 머리채를 휘둘리고 관이 벗겨지는 수모를 당했다.

 

불과 지금으로부터 120여 년 전 우리 할아버지 대에 나라의 국모가 살해되는 참변이 일어났다.

인류 역사를 전쟁이 반복되어 온 ‘피의 목욕탕’이라고 한다지만 일본이 저지른 을미년의 만행은 동서고금에 그 유사 사례를 찾기 힘들다.

국가 간에도 도덕률이 존재한다면 일본의 범죄는 배은망덕의 극치에 해당한다.

 

일본이 이렇게 대담한 사건을 저지른 배경은 무엇일까?

1894년 일본은 청일전쟁淸日戰爭에서 승리하여 청의 요동반도를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895년 4월 일본의 중국 진출을 우려한 러시아·프랑스·독일이 일본에 압력을 넣어(삼국간섭) 요동반도를 청에 반환하게 한다. 이를 지켜본 고종과 명성황후는 일본을 견제할 대안 세력으로 러시아를 선택하고 이해 8월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고 반일, 친러 정책을 추진한다.

일본 입장에서는 공들인 조선을 자칫 러시아에게 빼앗길 수 있다는 우려 속에 폭력으로 정국을 뒤집어 놓기 위해 직접 황후를 시해하는 음모를 꾸민 것이다.

 

을미지변을 조선인의 소행으로 돌리려던 일본의 흉계는 실패하고, 국내외의 거센 반발에 부닥친 일본은 미우라 공사와 스기무라 서기관 등 사건에 개입한 일본인 47명을 소환하여 히로시마 재판소에 회부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다음 해 1월에 증거불충분의 이유로 석방된다. 을미지변 이후 친일 세력이 주도한 김홍집 내각이 구성되고 을미개혁乙未改革이 실행된다. 태양력太陽曆 사용, 단발령斷髮令 등이 이때 공포됐다.

국모 시해라는 전대미문의 만행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전국 각처에서 유생들이 의병을 일으켰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다음 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俄館播遷)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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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와 독립운동사①

진실의 역사

환단고기와 독립운동사

천 년의 세월에 걸쳐 쓰인 다섯 권의 사서를 한 권의 『환단고기』로 묶은 인물은 바로 1864년 평안도 선천에서 태어난 운초 계연수(1864~1920)이다. 자신의 집안에서 보관해 오던 책과 지인들로부터 구한 책을 한 권으로 엮어 편찬한 것이다.

 

안함로의 『삼성기』는 운초의 집안에 전해 오던 것이었고, 원동중의 『삼성기』는 태천에 살던 백관묵白寬默에게서 구하였다. 『단군세기』 또한 백관묵의 소장본이고, 『북부여기』는 삭주 뱃골 사람 이형식李亨植의 소장본이었다. 『태백일사』는 운초의 스승인 해학 이기李沂의 집안에 전해 오던 것이었다.

 

백관묵(1804~?)은 문재로 이름이 높은 명문 집안 출신으로 헌종 6년(1840) 식년시式年試에 진사로 합격하였고 많은 책을 소장하고 있었다.『백관묵의 집안은 대대로 학자 집안이었을 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 때 그의 아들과 손자들은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

일간지 <문화경제신문>의 기사에 따르면, 아들 백삼규白三圭(1855~1920)는 유학자이자 의병장이었다. 백삼규는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을 계기로 의병 운동을 시작하여, 1910년 경술국치 후 큰아들 인해仁海를 데리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농무계農務契와 환인계를 조직하여 애국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지도하였다.

1919년에는 대한독립단을 조직하고 부총재에 추대되었으며,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보민회保民會, 일민단日民團, 강립단强立團 등을 숙청하는 활동을 벌이다가 이듬해 일본군에게 붙잡혀 총살당하였다. 백삼규의 장남 인해도 독립단에 가입해 활동하던 중 1921년 불심검문에 걸려 격투 끝에 순국하였고, 그 후 둘째 인제仁濟도 순국하였다.

삼부자가 모두 일제에게 희생되어 구국의 충혼으로 승화한 것이다.<문화경제신문>, “화서학파華西學派 인물열전” 246회, 2011.4.9.

 

그리고 이형식은 1796년생으로 백관묵과 같은 해에 식년시 생원과에 합격하였다. 계연수가 이형식을 생원이 아니라 진사라고 부른 것은 그의 부친 이사겸李嗣謙이 진사로 합격한 내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형식 소장본에는 『단군세기』도 합본되어 있었는데, 그 내용이 백관묵의 『단군세기』와 동일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환단고기』가 탄생하기까지 백관묵과 이형식을 비롯한 많은 사람의 공덕이 있었지만, 특히 계연수와 이기의 혈성과 희생이 컸다.
이기(1848~1909)는 전라도 만경 출생으로 정약용의 학통을 계승한 실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다.

15세 때 향시鄕試에 나가면서 뛰어난 재주와 명성이 여러 고을에 알려졌다. 이기는 당시 유명한 선비들과 교유하였는데,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1840~1910),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과 더불어 ‘호남의 삼재三才’라 불리었다.

 

이기의 문장에 대해 이정직은 “대개 백증(이기의 자)의 글은 쓸데없는 글자나 구절이 없어서 마치 꽃 중의 꽃이요, 곡식의 자양분과 같고, 따뜻하고 윤기가 있으며, 법도에 맞고 아담하다”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이건창李建昌(1852~1898)은 “백증의 문장은 수를 놓은 비단이다”라고 평하였고, 황현도 “씩씩하고 뛰어나며, 뛰고 달리는 기운이요, 특출하게 아름답고 박학한 문장이다”라고 칭찬하였다.

 

성리학과 실학을 모두 섭렵한 이기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였고, 저항의 일선에서 애국 활동을 하였다.

1894년(고종 31)에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동학군 최고 지도자인 전봉준을 찾아가서 ‘동학군을 이끌고 한양으로 올라가 간사한 무리를 물리치고 임금을 받들어 국가의 질서를 새롭게 하자’는 뜻을 전했다. 전봉준은 이기의 뜻에 호응하여 남원에서 동학군을 지휘하던 김개남과 협의하도록 하였으나 협의는 실패로 돌아갔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노골적으로 조선에 침투해 오자 농민생활의 안정과 국권을 회복하는 데에는 토지개혁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여, 서울로 올라가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 어윤중魚允中을 만나 토지제도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뒤, 전후戰後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강화회의미국 포츠머스에서 열릴 때, 이기는 동지들과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의 독립을 보장해 달라는 호소를 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여권이 나오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미국행에 실패한 이기는 동향 후배이자 동지인 나인영羅寅永(나철羅喆, 1863~1916)을 비롯한 몇 명의 독립운동가와 그해 8월 일본으로 건너가 일왕과 일본 정계 요인들에게 조선 침략을 규탄하는 서면 항의를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적 투쟁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그해 11월 소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12월에 귀국하여 서울에 머물던 이기는 곧 이어 모친상을 당해 귀향하였다. 그러나 국권이 기울어지는 위급한 시기였으므로 ‘상복을 벗어버렸다’는 비난을 무릅쓰고 다시 상경하여 한성사범학교 교관으로 들어가 후진 양성에 진력하였다.

또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고 월보를 발행하여 국민 계몽에 앞장섰다. 이기는 교육의 목적을 국권 회복에 두고, 교육을 통하여 자강自强, 자급自給으로 실력을 길러 나라를 지키자고 주창하였다.

 

1907년에는 육순의 나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인영, 오기호, 윤주찬, 김인식 등과 을사오적乙巳五賊 암살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계획이 실패로 끝나 7년의 유배형을 받고 진도로 귀양을 갔다.

다행히 2년 후에 석방되어 서울로 돌아온 이기는 『호남학보湖南學報』를 발행하고, ‘단군 성조의 얼을 기리고 고조선의 역사를 부흥시키자’는 취지로 단학회檀學會를 조직하여 계몽운동과 구국운동을 계속 펼쳤다.

하지만 끝내 국세가 기울자 1909년 7월 13일 서울의 한 여관에서 절식絶食으로 62년의 일생을 마쳤다.

 

이기의 생애에서 특히 시선을 끄는 것은, 이기가 『단군세기』를 쓴 이암과 『태백일사』를 쓴 이맥(이암의 현손)의 후손이라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이기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역사서를 읽었고, 우리 고대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쌓게 되었다.

그가 계연수에게 전해 준 『태백일사』도 집안의 가보家寶로 전해오던 것이다.

이러한 이기를 스승으로 모셨기 때문에 계연수는 『환단고기』를 발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계연수에 대한 기록은 『해동인물지』(1969)와 『정신철학통편』(1920) 외에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계연수의 간략한 생애가 기록된 『해동인물지』에 따르면, 계연수의 자는 인경仁卿, 호는 운초雲樵이고 평안도 선천에서 살았으며, 이기의 문하생이 되어 백가百家의 책을 섭렵한 후 무술년(1898)에 『단군세기』와 『태백유사太白遺史』 등을 간행하였다.

기미년(1919)에 임시정부의 이상룡 막하에 들어가 참획군정으로 공을 세우고 경신년(1920)에 만주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정신철학통편』은 계연수가 묘향산에서 석벽에 새겨진 『천부경』을 발견한(1916)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지난 30여 년 동안 안경전 역주자는 『환단고기』를 연구하고 서지학적 정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현 단단학회檀檀學會 회장인 양종현(1948~ )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를 통해 계연수의 실체를 좀 더 분명하게 파악하게 되었다.

 

양종현은 『환단고기』의 전수자인 이유립의 증언을 바탕으로 계연수의 생존 당시 모습을 초상화로 그려 소장하고 있었다.

양종현씨는 환단고기가 이유립선생의 창작이라는 강단 식민사학의 음해에 대노를 했다.

그는 공부를 할 때 끌로 판 목판 인쇄본의 글자를 한 글자씩 짚어가며 스승님과 같이 공부를 했다고 확고하게 증언하고 있다.


계연수는 1864년에 평안도 선천에서 태어났다. 일찍 부모를 여의었는데,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한 번 보면 곧바로 외울 만큼 기억력이 뛰어났다. 동방 한민족의 옛 역사와 민족정신에 관심이 지대했던 그는 27세(1890) 때까지 약초를 캐어서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여러 양반가와 사찰에서 비장하던 서책과 금석문, 암각문 등 각종 사료를 수집하였다.

한민족의 역사를 밝히고자 한 계연수가 뜻을 이룰 수 있게 된 결정적 계기는 해학 이기와의 만남이었다.

1897년(34세)에 이기의 문하에 들어간 계연수는 스승의 가르침 아래, 그로부터 두 해 동안에 이암의 『태백진훈』과 『단군세기』 그리고 『참전계경』, 『태백일사』, 『천부경요해』 등을 간행하였다. 『환단고기 역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