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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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종교는 없다'를 읽고③ 2
  2. '종교는 없다'를 읽고②

'종교는 없다'를 읽고③

진실의 역사

'종교는 없다'를 읽고


예수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14:16)라고 했다.

이는 진리가 깨어진 나(법신)를 이야기 하는 것이지, 예수란 색신(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가 깨어진 자아인 것이다. 진리가 깨어진 모든 성인은 같은 선언을 하였다.

 

우리자신이 기존관념의 노예가 되어 있지는 않은가 살펴봐야 할 것이다.

이제 예수 정신, 석가 정신에 따라 돌아가야 할 때다.

우리는 모든 종교, 모든 교리를 떠나 진정한 자유를 성취할 수 있으며 예수와 석가가 추구했던 참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주체적 인간, 참사람은 종교나 교리, 사상, 제도 등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어버리고 진정한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근본으로 돌아가는데는 많은 고통과 시련이 따른다.

인간의 관념이 거듭나는 과정은 천지개벽보다도 더 어렵다.

중세의 카톨릭은 지상의 모든 권한을 쥔 강력한 집단이었다.

중세의 어둠을 벗긴 것은 종교적 신본주의가 아니라 인본주의에 눈 뜬 르네상스였다.

중세 카톨릭 중심의 체제가 무너지면서 종교개혁이 일어난다.

그후 역사상 가장 잔인한 종교전쟁이 구교와 신교사이에 벌어진다.

아마도 21세기를 맞이하면서도 고착적인 인간 관념은 전쟁을 통해서만 부서질지도 모를 일이다.

토인비는 21세기를 역사가가 서술할 때 동서 종교의 만남과 이해라고 기록할 것이라고 하였다.

인간과 우주의 궁극적 실재를 신이라 한다.

그 신에 대한 경외심은 기독교인들에게만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가진 자나 ‘잘 믿는다’고 자랑하는 사람, 각종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예수의 파격적 발언은 결국 기존 체제로부터 미움을 샀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예수는 유대교 지도자인 대제사장들에게도 경고를 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오히려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21:31)

 

교권을 절대시하던 중세 카톨릭에 반대하여 일어난 프로테스탄트가 어처구니없게도 교권대신에 성경의 문자주의에 매달리고 자기와 다른 해석을 하는 이들을 ‘이단’으로 몰면서 수천 교파로 갈라진 것은 아이러니다.

예수가 그토록 원했던 하나님의 나라는 기독교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제 기독교는 우월주의와 배타주의에서 벗어나야한다.

하나님 나라는 종교간의 장벽, 인종간의 장벽, 국가 혹은 문화적 장벽을 초월하여 실현될 수 있는 열린 세계이다.

종교는 이 시대가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알아야한다.

종교의 목표가 인류구원과 세계평화와 사랑에 있다면 그것을 이루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들을 제거하는 근본적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교파 이기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종교인들은 철저히 자기를 비우고 교단과 교리의 벽을 넘어서야 한다.

그럴 때만이 하나님을 자기 안에 모실 수 있고, 예수가 소망했던 행복과 평화의 세계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는 없다' 책에서》

'종교는 없다'를 읽고②

진실의 역사

'종교는 없다'를 읽고
요즘 대형교회의 재정 불투명과 세습, 목회자들의 부도덕성 등은 종교 지도자들이 세상 사람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아집과 독선을 버리고 자신을 비울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나를 버리고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이 참다운 종교의 길이다.

종교는 나를 비울 것을 가르친다. 오로지 자기 자신이나 자기 교파,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해 예수의 이름을 파는 사람에 대해 예수는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나라 초대 선교사들은 한국인과 한국 문화 속에 무엇이 있었다 해도 일고의 가치도 없는 악의 소산이라 하며 일망타진을 기도했다.

그러면 왜 지구촌에 이 많은 종교가 생겨나도록 하나님은 방치하셨는가.

타종교는 악의 소산이라고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깨어진 진보신학자들은 기독교가 개종 중심 선교신학을 견지하는 것은 제국주의적인 발상이라고 비판하며 기독교 토착화와 다원주의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한국 기독교는 다원주의 사회가 도래하고 있음에도 종교 다원주의에 대해서는 여전히 냉소적이다.

 

그러나 21세기는 정복주의적, 배타주의적 선교신학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종교 다원주의의 중요한 특징은 그리스도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신학을 전개함으로써 타 종교와의 대화를 통한 다원성을 인정하는데 있다.

대체로 한국 기독교 신자들은 “불교의 신, 알라신, 한울님이 따로 있다”고 믿지만 그런 종류의 여호와 신이라면 결국 유일신관에 위배된다.

한 종교에 귀의한 사람들만 보호해주면 천국에서 건사해주는 신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결국 진정한 유일신관은 종교 다원론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밖에 구원이 없다는 교리는 신학적인 천동설에 지나지 않는다. 기독교가 여러 종교 중심이고 다른 종교는 그 둘레를 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코페루니쿠스가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 중심이고 지구도 그 주위를 돌고 있다고 말한 것처럼, 우리는 기독교든 불교든 타종교든 자신의 종교 중심으로 우주가 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기독교만의 하나님이 아니다.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 지구촌 모든 종교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구원섭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지며, 모든 종교의 길은 하나로 귀일돼 하나님의 구원섭리가 매듭짓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머무르고 있느냐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예수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갈수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특히, 예수는 고난의 연속이라고 할 만큼 기존의 종교와 제도, 권력과 투쟁을 벌였다.

예수는 사즉생(死則生)의 진리를 가르치고 몸소 실천하신 분이다.

닫힌 종교는 교리적 종교, 율법적 종교, 의례 중심 종교, 교권주의 종교, 배타와 우월의식에 사로잡힌 종교, 지극히 독선적이고 광신적 종교 행태를 구가하는 종교라 할 수 있다.

반대로 열린 종교는 자기 종교의 절대적 신념을 약화시키지 않으면서도 타종교의 상대성을 충분히 이해하는 성숙한 자세를 지닌 종교다.

그동안 기독교는 사랑과 평화의 윤리를 내세우면서도 배타주의적이고 공격적이며 편협한 차별 정책을 펴왔고, 구원과 은총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인간의 죄의식을 병적으로 과장하였다. 결국 예수를 배타적 인물로 왜곡시켜온 것이다.

상대적인 것이 절대적인 진리임을 알아야 한다.

음양으로 순환하는 것. 그 상대적 운동을 하는 원리가 절대적인 진리인 것이다.

변하는 것이 그자체가 절대적인 진리인 것이다. 제행무상이다. 모든 것은 변한다.

석가도 금강경에서 “나의 설법은 물을 건널 때만 필요로 하는 뗏목으로 알라.”, “강을 건너면 배를 놓아라”고 했다.

절대적이라 주장하고 자신이 믿는 것만이 진리라고 주장한 자들에 의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단으로 몰려서 희생당했는가.

과연 그 확신이 절대적 진리였던가! 결국 자신만의 착각이었던 것이다. 한국의 종교인들은 자기 주장을 절대시 하는 경향이 있다.

각 종교에서 주장하는 진리도 문화, 정치, 사회, 언어, 역사의 제약을 받는 상대적 측면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는 버림으로써 강해짐을 가르쳤다.

그러나 소중한 가치인 청빈, 비움, 겸손, 버림, 절제, 헌신의 덕목은 설자리를 얻지 못하고 도리어 남보다 강해지는 법, 남보다 앞서나가는 법, 남을 이기고 성공하는 법을 가르치는 교회가 인기를 얻고 있다.

성공과 부귀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가르치니 말이다. 저 가난한 나라는 하나님의 저주란 말인가?

예수의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는 말씀,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는 말씀은 뭘까. 과연 예수가 재림한다면 뭐라 할 것인가. 대형교회와 교권, 교파주의, 세속에 매몰돼 있는 개별교회는 물론 종단의 분열과 분쟁이 늪 속으로 빠지는데도 교세 확장만 부축이고 내 종교가 최고라는 독선과 자만만 심어 준다. 자기 자신을 깊이 성찰할 수는 없는 것인가?

자기를 비울 때 하나님이 찾아온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린도전서3:16)

 

다음은 예수의 일성이다.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요한복음2:16)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따르는 것이요, 예수와 같은 믿음을 갖는 것이다. 곧 예수와 같이 되는 것이요. 예수를 닮는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으로 현실적 한계를 초월하여 자유를 얻은 것처럼 우리도 그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마음이 핵심인 것이다.

유대교의 낡은 안목으로 새 시대 지도자인 예수의 행동을 이해하기란 어렵다. 율법의 노예가 된 유대교 지도자들은 새 시대가 도래 했지만 새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의 한국교회의 지도자는 유대교 지도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 그 당시 예수의 파격적 행동을 받아들일 지도자는 거의 없었다.

만일 예수가 오늘날 한국사회에 온다면 기독교인들 중에 몇 명이나 예수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교회와 신자는 많건만 하나님의 참뜻을 깨달은 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교회가 새롭게 되고 온전하게 거듭나기 위해서는 깨달은 자들이 있어야 한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간파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부패는 진리를 자기식으로 해석하고 자파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해 왔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눈에는 잘 살고 못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성숙한 신앙은 기복신앙을 극복하고 고난과 시련을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복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의 성공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우리가 궁극적 도달해야 할 숭고한 삶의 가치며 실재이다.

 

구약성경은 여성차별을 당연시하며 여성을 재산의 일부로 간주하고 매매하기도 했다.

이런 고대사회의 가치관이 현대사회에 적용돼서는 안 된다. 기독교 근본주의는 성경의 무오류, 예수의 신성, 처녀탄생, 대속적 구원, 예수의 부활과 재림 등을 핵심교리로 삼고 있다.

여기에서 벗어난 개인이나 집단, 종교에 대해 관용은 없다. 세계 분쟁에는 꼭 근본주의가 관여하고 있다.

과연 근본주의자들의 행동은 하나님의 뜻인가?

기독교는 원래 열린 종교이다. 유대교는 율법과 종교 의식에 집착하는 닫힌 종교였다.

요즘 기독교는 어떤가. 자신을 처음 핍박했던 ‘닫힌 종교’를 닮아가고 있고, 자신을 핍박한 자들보다 더 철저하게 다른 종교나 신앙체제를 거부하고 있다. 지금은 한 종교의 독점이 불가능한, 공존의 다종교 사회이다.

예수는 부패한 종교적 현실과 맞서 싸우며 가난하고 억눌린 자의 편에 섰다. 종교적 위선을 철저히 거부했다.

예수는 예루살렘 입성 후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너희들이 성전을 강도의 굴로 만들었다”고, “이런 성전은 헐어 버려야한다”고 분노했다.(마가11:15~) 그러나 지금의 교회에 이러한 예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부패권력을 옹호하고 기득권 유지에 급급한 모습에 씁쓸할 뿐이다. 이제 예수의 본래 모습을 되찾지 않으면 민중은 교회를 떠날 것이다.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과 기독교가 공존할 기회를 상실하는 엄청난 역사적 과오를 남겼다.

십자군 원정 실패이후 카톨릭은 종교적 위기 극복을 위해 이단적 신앙에 대해 격렬한 마녀사냥을 한다.

이로써 수많은 무고한 여성이 죽고 학살 당한다. 결국 중세 사회처럼 종교가 부패할 때 새로운 종교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물론 처음에는 이단과 사이비로 매도되지만 결국 그 시대의 대안 종교로 등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초기 기독교도 예수는 사회의 이단자요, 그를 따르는 이들도 400년간 사이비 종교인으로 몰려 핍박당했다.

당대에 비윤리적이라고 지탄받던 초기 기독교가 지금 세계적 종교로 성장한 것을 보더라도 일부에서 단죄하는 이단과 사이비 종교에 대한 접근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

지금은 기독교인들이 신종교를 무조건 이단이라고 매도한다.

일제가 천도교 보천교 대종교 같은 민족종교를 유사종교로 매도한 후 민족종교는 아직도 이상한 종교라는 낙인을 벗어 버리지 못하고 있다. 자신 종교의 우월성의 감정으로 상대방을 매도하지 말아야한다.

구약성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야훼와의 계약을 중심으로 엮어진 신앙의 역사이다.

구약성서가 고난 받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이다 보니 중동지방의 작은 부족적 신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을 택한 백성’으로 삼고 그와 반대되는 족속은 무자비하게 쳐부수는 신으로 부각되고 있다.

하나님은 인류 보편의 하나님이다. 수많은 민족과 부족이 세계 곳곳에서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도 하나님의 실재를 체험하고 믿어 왔다.

 

구약을 살펴보면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민족신이지 결코 인류 보편의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떤 이론이나 신관에 갇혀있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초월적이고 만유에 편재하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수많은 선지자와 종교와 지도자를 보내 구원섭리를 펴고 있다.

하나님은 특정교단의 교리로서는 알 수 없는 분이요, 접근할 수 없는 분이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비워야 한다.

백두산 정상에 오르는 길이 여러 길이 있듯이 종교는 궁극적 실재에 도달하는 여러 길을 각기 체험한 지역문화를 통해서 제시한 것이다.

정상에서 보면 결국 여러 길은 정상에 오르는 방편이었음을 깨닫는다. 사방이 환히 보이듯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 하나임을 알게 된다.

 

다른 종교를 거짓된 것으로 배척하는 독선적 태도는 다른 종교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것일 뿐만 아니라, 자기 종교의 진리도 편협하게 이해하는 것으로 성숙한 종교인의 자세라 할 수 없다.

남을 억누르고 자신만이 승자로 군림하겠다는 패권주의적 상극논리는 구시대적 사고방식일 뿐이다.

정보화 시대를 맞아 인간을 갈라놓고 구속했던 모든 경계선이 무너지고 있다.

그동안 높게만 생각됐던 종교의 담도 언젠가는 무너지게 될 것이다. 결국 닫힌 종교는 도태된다.

‘진리는 하나다’라는 뜻이 남을 배척하고 제거하고 살아남은 그 종교의 교리만 절대적이란 뜻이 아니지 않는가.

‘지구는 하나다’라는 말은 다민족 다 국가를 수용하는 표현이듯이 모든 종교를 수용하는 진리, 상대성을 인정하는 진리가 절대적인 진리인 것이다.

 

오늘날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종교가 온갖 갈등과 분쟁과 부패의 온상이 되고 있다.

더구나 디지털 정보화 시대는 모든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교회가 예수의 열린 종교로서의 귀한이 되지 않고는 결국 시대의 칼날을 받아 개혁을 당하고 말 것이다.

종교개혁은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다. 본질을 회복하기 위한 몸부림이요.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회복은 진리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한국 교회가 개혁되어야 하는 이유는 유대교나 중세 교회와 같이 형식화 됐다는 것이다.

교회의 몸집을 키우는데 혈안이 된 나머지 초대 교회와 같은 진정한 은혜는 찾아보기 어렵다. 자기 교회, 자기 교파만이 최고라는 우월의식에서 벗어나야한다. 참신앙, 참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자세, 겸허한 마음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너희들은 항상 깨어 있으라. 주께서는 도적과 같이 임하리라.” 셨다. 믿는다고 해서 알아보는 것이 아니란 말씀이다.

오직 깨어진 마음, 열린 마음, 참을 지향할 때만 알아 볼 수 있으리라.

21세기는 종교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다. 디지털 문화는 종교간의 벽, 교파 이기주의를 타파할 것이다. 종교 역시 시대적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자연 도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로마서에 보면 “올바른 사람이 없다. 단 한사람도 없다. 깨닫는 사람도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모두가 비뚤어져 쓸모없게 되었다...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며 그들의 혀는 거짓을 말하고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흐르니 그들의 입은 저주와 독설로 가득하다...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고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다”라고 하고 있다.

예수와 석가는 자기중심적 삶에서 초월과 실재 중심의 삶으로 전환함으로써 자기로부처 완전히 해방되었다.

자기 부정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고 사랑과 자비의 삶을 살았다.

예수와 석가는 철저히 자기를 비움으로써 하나님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하나님처럼 보였고, 철저히 하나님에게 자기를 맡겼기 때문에 하나님의 권능이 고스란히 나타났던 것이다.

인간 본연의 모습(하나님의 신성)을 회복한 예수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산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믿음을 그대로 본받아야 한다.

예수가 개혁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시대적 상황에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인습적이고 상식적인, 그리고 통념적이고 통속적인 가치관과 세계관을 완전히 뒤집어 버렸다.

자기의 이해관계에 얽혀서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았다. 실재와 진리를 그대로 본 것이다.

궁극적 실재와 하나가 되고 진리와 하나된 상태에서 예수는 “내가 곧 진리”라고 선포 했다.

석가의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고백도 이러한 상황에서 나올 수 있었다.

 

곧 모든 인간의 궁극적 목적은 예수의 선포처럼 내가 곧 진리가 되는 것이다. 진리와 하나된 인간을 동양에서는 태일太一이라고 한다.

예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태12:34)라고 저주했다. 그리고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 하도다“(마태23:27)라고 질타한다.

예수의 눈에는 잘 믿는다고 하는 이들이 모두 ‘외식하는’ 이들로 보였다. 근본정신을 외면한 채 외식하는 유대교 신자들을 예수가 책망한 사정을 우리는 반면 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종교는 없다' 책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