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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일본이 키워준 이병도와 그 후예들 강단사학 점령
  2. 식민 사관의 감춰진 맨얼굴① 2

일본이 키워준 이병도와 그 후예들 강단사학 점령

진실의 역사

일본이 키워준 이병도와 그 후예들, 강단사학을 점령하다.

 

근대적 역사 서술과 조선사 편찬이라는 허울 좋은 구실로 우리 고대사를 삭제한 일제는 도처에 식민사관의 독버섯을 심어 놓고 물러갔다.

그 치명적 독버섯 중의 하나가 일제의 하수인 노릇을 했던 이병도李丙燾이다.


이병도는 서인과 노론의 대표적 가문의 하나인 우봉 이씨牛峰李氏의 후예로 태어났다.

보광학교와 일본인이 운영하던 불교 고등학교를 다녔고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한 후 와세다대학 ‘사학 및 사회학과’를 졸업한 국내 최초의 대학 출신 역사학자이다.

일본 유학은 이병도의 역사관 정립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병도에게 영향을 준 일본 학자는 요시다 도고吉田東伍,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廣이다.

이병도는 자신의 생애에 ‘가장 영향력을 많이 준 사람’으로 요시다를 꼽았다.

이병도가 서양사를 전공하려다가 한국사로 방향을 바꾼 계기는 바로 요시다가 쓴 『일한고사단日韓古史斷』이었다.

요시다는 일본이 조선 국권 강탈 이전부터 식민사학을 준비하는 데 절대적인 구실을 한 인물이다.

이병도와 그의 선후배 한국 유학생들은 요시다에게, ‘일본이 한국을 동화시키려고 하는데 과연 그렇게 될지’ 질문을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요시다는 “단시일엔 안 된다. 그러나 앞으로 50년만 이 상태가 계속되면 반드시 동화가 될 것이다”라고 자신 있게 답했다고 한다. (김정희, ‘식민사관을 계승한 이병도 사관’, 『청산하지 못한 역사』 3집)

 

이병도는 요시다 후임으로 온 쓰다 소우키치 밑에서 강의를 들으면서 국사를 연구해 보겠다는 뜻을 굳히고, 쓰다의 지도 아래 역사 연구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쓰다의 소개로 동경제국대학 교수 이케우치 히로시를 만나 사적인 지도를 받았다.
동경제국대학 사학과는 실증사학을 창시한 랑케의 제자 리스L. Riess를 초빙하여 창설한 학과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실증사학이 일본 사학계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케우치는 만주를 일본 손에 넣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진 만철조사부라는 기관에 학문적으로 참여한 제국주의 사학자이고, 이병도를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도록 추천하였다.

이병도가 제국주의 식민사관을 가진 일본 학자들에게 영향을 받은 데에서 우리나라 근대 역사학의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이병도는 1925년 조선사편수회에서 수사관보修史官補로 학문적 연구를 시작했다.

이병도는 이마니시 류今西龍와 함께 고려 이전 시기를 담당했고 자연히 주로 고대사를 연구했다.

그런데 이병도는 “우리 사회는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철기 시대로 들어온 일종의 변칙적 발전”을 하였다고 확신하였다.

한사군 이전은 미개사회이고 한사군이 우리나라에 철기 문화를 전래한 이후 국가가 성립되었다고 하였고, 고려 시대까지도 낙후한 도참사상에 의해 지배되었다고 보았다.

이처럼 우리나라 문명이 중국의 식민지 지배를 받으면서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보았으니,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연구 결과를 낸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런 결과는 모두 일본 사학자들이 실증사학이라는 미명하에 한국 고대사를 부정한 것을 그대로 답습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이병도는 와세다 대학 동창, 경성제대 출신 학자들과 함께 1934년에 진단학회震檀學會를 만들었다.

그 주요 구성원은 조선사편수회 활동도 함께 하고 있었다.

따라서 진단학회도 일본의 논리를 크게 벗어날 수 없었다.
안타깝게도 해방 후 이들이 국사학계를 주도하였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백남운白南雲(1894~1979) 같은 사회경제사학 계열의 사학자들이 월북하고, 안재홍安在鴻(1891~1965)과 정인보鄭寅普(1893~1950) 같은 민족사학의 거목이 납북되자, 이병도와 그 제자들은 식민사학을 실증사학으로 위장시켜 한국 역사학계를 좌지우지하였다.

해방 이후 이병도의 주요한 근거지는 ‘국사편찬위원회’였다.

이병도는 신석호, 김상기 등과 함께 임시 중등국사교원 양성소를 설치하여 교원 양성에 앞장섰고, 국사편찬위원회 창설에 일등 공신 노릇을 했다.

 

그런데 광복 후 국내 사학계를 이처럼 식민사학자들이 장악할 수 있었던 데에는 정치적 배경도 작용하였다.

일본이 물러가고 이 땅에 들어선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이 친일파 관리와 학자를 기용한 것이다.

미군정 3년이 끝난 뒤 이승만 정부는 친일파 숙청 건의를 묵살하고, 심지어 반민족 행위자를 처벌하기 위해 제헌 국회에 설치한 반민특위反民特委 의 활동도 무산시켰다.

해방 후 독립운동의 공로로 훈장을 받은 사람은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이시영뿐이었다.

이렇게 친일파가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였기 때문에 국내 사학계도 이병도 일파가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는 2차대전이 종결된 후 나치에 협력한 사람 70만 명을 체포하고, 1만 8천명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중국도 중일전쟁 당시 일본에 협력한 민족반역자 십 수만 명을 총살하거나 처벌하였다.

필리핀, 베트남, 미얀마 역시 태평양전쟁이 끝난 후 자국의 친일파를 청산하였다.

무려 35년 동안 일제의 악랄한 지배를 받은 대한민국은 오히려 친일파 청산을 하기는커녕, 친일파를 등용하여 출세의 기반을 만들어 준 유일한 나라이다.

이병도 후손들은 3대 동안 11명의 교수진을 배출하며 말 그대로 황금계보를 이으면서 서울대총장 ,문화재청장등을 역임했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심각한 부패는 이런 부도덕성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다.

이병도는 서울대학교에서 한국사를 가르치면서 이기백, 김철준, 변태섭 등 2세대 사학자를 양성하였다.

2세대는 노태돈, 이기동 같은 3세대를 양성했고, 3세대는 송호정으로 대표되는 4세대를 배출하였다.

송호정은 한국교원대에서 교편을 잡아 식민사관에 물든 역사 교사를 대거 양성하고 있다. (김종서, 『신화로 날조되어 온 신시·단군조선사 연구』, 72~74쪽)

 

이병도와 그 제자들은 쓰다의 조선사 이론에 조선 후기의 노론사관을 가미해 만든 이론을 한국사의 정설로 만들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한국 사학계는 식민사관과 노론사관에 젖줄을 대고 있다.

노론사관이란 한국 학계가 조선 후기사를 인식하는 사관을 말한다.

노론의 뿌리는 광해군을 명나라의 배신자로 몰아 축출하고 그 대신 인조를 앉힌 서인들이다.

서인이 남인에게 정권을 빼앗겼다가 다시 찾은 후,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다.

남인에게 역모 죄를 뒤집어씌워 죽인 주동자 그룹이 노론이다.

조선 멸망 때까지 거의 늘 정권을 장악한 노론의 상당수가 일제의 조선 침탈에 협력하였다.

이 노론 출신의 학자들이 조선사편수회를 거쳐 해방 후 한국 사학계의 주류가 되었다. (노론사관은 또 다른 사대주의 사관이다<한겨레신문>,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노론사관에 일그러진 조선후기사”, 2009. 7. 18)

그들은 이론異論을 제기하는 학자는 무조건 재야사학자로 몰아 추방하고 역사 해석권을 독점하였다.

 

이병도의 호를 따서 두계斗溪학파라 불리는 그들의 파렴치하고도 부끄러운 일화가 있다.

1979년 충북 중원에서 고구려비가 발견된 적이 있다.

그런데 비문의 여러 부분이 풍상으로 마모가 심해 학자들 간에 해석이 다양하였다.

이병도는 이 비석 앞면 상단의 잘 보이지 않는 제액題額을 건흥建興 4년이라 판독하였다. 

다른 학자들이 그 논거를 묻자 이병도는 “오매불망 끝에 꿈에 건흥 4년이 나타났다”라고 답했고, 제자들은 “이 학문적 집념을 배워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는 사석에서 오고간 이야기가 아니라 학회에서 발표되어 학술지에 게재된 실제 사건이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건흥은 고구려 장수왕의 연호이다.

건흥 4년이 장수왕의 재위 4년이라면, 이때는 CE 416년이다.
이것은 스승이 잘못된 주장을 했다고 하더라도 제자들이 그것을 말릴 수 없고, 더욱이 그것이 학술지에 게재될 수밖에 없는 우리 사학계의 풍토를 단적으로 드러낸 사례이다.

 

자신들의 견해에 도전하는 무리들은 재야사학이라는 이름으로 매도하면서, 이병도의 말도 되지 않는 ‘현몽’ 논거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이병도와 그 제자들의 학문적 양심이다.

역사가가 정확하게 역사를 기술하는 것은 미덕이기 이전에 신성한 의무다.

그러나 한국의 국사학계, 특히 두계학파는 그러지 못했다.

이병도와 그 제자들은 우리나라 사학계,특히 고대사 학계를 장악했다.

식민 사관의 감춰진 맨얼굴①

진실의 역사

식민 사관의 감춰진 맨얼굴①

일제시대 일본인들의 한국사 연구는 순수한 학문적 동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제국주의 침략의 이론적 도구를 제공하려는 목적으로 추진되었다.

일제 식민사학과 그 후예들은 예나 지금이나 단군을 부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유는 조선은 자가발전의 능력이 없으므로 외세의 지배와 문물전수를 통해 발전되었다는 제국주의 논리를 강변하기 위해서였다.

뉴라이트 역사관도 매 마찬가지다. 기독교 들어오기 전 한국은 미개사회였다가 기독교가 들어오고 선진사회가 되었다는 논리다.

그래서 일제시대는 하나님의 축복이란 말을 문창극이 했던 것이다. 일제시대는 말 그대로 기독교 부흥의 결정적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그러니 과거 수천년 전 기독교가 없을 때, 서양보다 더 강대한 단군의 고조선이 있었다는 것은 애써 삭제하려 한다.

따라서 일제식민사학과 뉴라이트 역사관은 동색이다. 자국의 역사를 일제와 미국의 입장에서 기술을 하고 자국역사를 폄훼를 하고 자기 조상에 테러를 가하는 것이다.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은 일본서기의 기록에 삼국사기 기록이 위배되었으므로 무조건 일본서기는 옳은 역사책이고 식민지 국가의 역사책은 조작된 것으로 몰아온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일본서기에 백제가 야마토 왜를 지해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따라서 이 기록도 일제의 식민지배에 장애가 되므로 거짓기록이라고 우겼다.

일제는 1916년 총독부 주재로 조선 반도사를 편찬하면서 한국사를 반도내로 축소시켰고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비장의 사료를 강탈해서 단군관련기록들을 닥치는 대로 없애 버렸다.

이렇게 몰수되어 태워진 사서만 20여만 권이다.

식민사학자들은 강대국인 일본(?) 미국에는 굴종적이었고, 일제강점기나 해방 후에도 자신의 민족과 민족사를 폄훼했다.

재미있는 사실 중 하나는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기록이 서로 충돌할 때마다 삼국사기의 기록이 사실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일본서기만 믿겠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행동은 성경의 구약창세기는 무조건 믿으면서 우리의 역사서는 위서라고 몰아붙이는 행동과 같다.

이미 모세의 홍해설화는 역사적 대차비교를 한 결과 허구임이 밝혀지지 않았던가. 성경의 모세기적으로 기록된 애굽왕은 버젓이 천수를 누리고 늙어 죽었고, 하물며 접시물에 빠진 사실조차도 없으니 말이다. 이집트의 왕과 병사가 다 죽었다면 국가위기가 와야 함에도 멀쩡히 태평하게 역사가 지속된 것을 어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역사적 사실과 믿음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조선사편수회는 학문조직이 아니었다. 식민지배의 정치적 목적으로 역사를 가공한 것이다.

그런데 해방된 지 7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식민사학 논리를 그대로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강단사학에선 단군을 신화라고 폄하하고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믿을 수 없다며 한국사의 시작을 서기 3세기 이후로 끌어 내리고 있다.

 

《다음은 일제강점기 사이토 총독의 교육시책이다》

1. 먼저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 민족 문화를 상실하게 하라.


2.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과 악행 등을 들춰내 그것을 확장해서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선의 청소년들이 그 조상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라.


3.그러면 조선의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때에 일본의 사적과, 일본의 인물, 문화를 소개하면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 글을 보면 지금 한국인은 사이토의 전략이 적중했음을 알게 된다. 자국 국민이 자국역사를 더럽고 비열하고 추악하다고 폄훼를 하고 일본 미국의 지배를 감사하다고 하는 인간들이 우글거리니 말이다. 이승만이 집권하면서 매국친일파들을 대거 등용한 후유증은 우리역사와 혼을 잃는 결정적 치명타를 안겼다. 해방 후 식민주류사학자들은 이중적 처신으로 생존해 왔다. 총론에서는 식민 사학을 비판하는 척하고 각론으로 들어가서는 식민사학 일색인 것이다.

박은식은 일제가 단군 조선을 말살함으로써 한국사의 시간을 축소시키려는 의도를 잘 알고 있었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사는 조선인이 써야한다”고 강조했다.

일본인이 조선사를 쓴다는 것은 자기 아버지 이름을 이웃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과 같다고 비유했다.

한국사를 자국과 외래 종교 성장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서 왜곡 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은 2007년부터 하버드대학 한국학 연구소에 10억을 주고 한국 상고사 6권을 영문으로 간행했는데 한국의 송호정, 여호규 등 식민사학의 계보를 충실히 따르는 학자들만 선발해서 편찬했다.

그런데 한결같이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식민사관 일색이다. 이를 보고 우당 이회영선생의 손자인 이종찬 전 국정원장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며, 식미사학 해체 범국민운동본부를 발족하였다.

 

식민사학자들이 지금까지 집요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 두 가지다.
하나는 한국사 또는 한국 문화의 발전에는 주체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타율성론이고, 또 하나는 한국사는 내적 발전이 결여되어 있다는 정체성론이다.

한민족은 근대사회로 발전할 수 있는 내적 역량이 없으므로 강대국의 식민지배를 받아야 발전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이 타율성론은 일본인에게는 한국사를 멸시하게 만들었고, 한국인에게는 열등의식을 심어주었다. 곧 식민지배가 한국인에게 시혜를 베풀었다는 것이다.

 

1945년 8월15일 한국인 중에서 해방을 기뻐하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바로 악질 친일파들이었다.

그런데 해방 후 이들이 한국고대사를 장악해서 자기 멋대로 주무를지를 누가 알았겠는가?

겉으로는 식민사학을 비판하면서 속으로는 지지하는 이중적 행보가 이들의 실체다.

윤내현교수가 고조선에 대한 시각을 중국의 고대 1차 사료에 근거해서 반박하자 식민사학계는 윤내현을 재야사학자라고 매도했다.

자기해석하고 다르면 무조건 이단이 되고 '유사역사학', '사이비역사학'이 되고 재야로 몰리는 것이다.

최근에도 이들은 자신들의 학문권력을 지키기 위해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유사역사학, 사이비사학이라는 부정적인 언어를 써가며 자신들의 역사관과 다른 이들에 대하여 온갖 음해를 가하고 있다.

 

특히 고대사의 가장 중요한 쟁점인 한사군에 대해 『한서』, 『후한서』, 『삼국지』 등 그 당시에 기록된 1차 사료에는 한사군의 위치를 하나같이 遼東요동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한반도 안이라고 기록한 사료는 단 하나도 없다.

그동안 식민 사학자들은 중국 고대 사료가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 북부로 비정한 것처럼 사기를 쳐왔다.

 

이병도는 우봉이씨로 항렬로 따지면 이완용의 손자뻘이다. 할아버지는 국토를 팔아먹고 손자뻘 되는 이병도는 역사를 팔아먹었다.

그런데 아직도 그의 후예들이 대한민국의 역사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이병도가 한사군을 그리 강조한 이유는 일제 식민사학은 정체성론에 따른 것이었다.

한국의 고대 사회를 미개한 사회로 간주하고 정복자인 한나라에서 철기 문화가 전래돼서 조선이 크게 발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나라에서 철기가 전래되었다는 1차 사료는 전무하다. 고조선이 미개사회였다는 것 또한 아무런 근거가 없다.

한마디로 역사학자가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다. 식민사학자들의 정신은 일본 극우파이면서 겉으로는 민족사학자로 대접을 받고 싶어 한다.

식민사학자인 이기동 같은 인물이 비난하는 인물은 식민사학을 비판한 학자들이고, 거꾸로 칭찬하면 식민사학을 옹호하는 인물들이라고 보면 100% 들어맞는다.

역사학계가 진정으로 학문을 하는 집단이라면 조선총독부의 시각이 아니라 단재 신채호, 위당 정인보의 학설을 지지하는 학자들도 일정한 세를 형성해야 마땅한데 현실에서는 그런 예를 찾기 힘들다.

신채호, 정인보, 윤내현을 적대하는 학자들은 바글바글하다.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타인의 진출을 조직적으로 방해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조폭의 행태와 다를 바가 없다.

식민사학의 태동배경은 학문이 아니라 식민 지배를 위한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왜 피땀 어린 국민 세금을 지원해서 이들을 지켜주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