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일본 군국주의 부활-일본, 다시 침략을 준비한다②

진실의 역사

일본 군국주의 부활-일본, 다시 침략을 준비한다

지금의 국제정세는 구한말 시절과 놀랍도록 비슷하다.

유일한 차이는 한국이 분단국가라는 사실이다.

이제 중국은 순식간에 세계 2위 경제 대국으로 부상하며 팽창주의를 취하고 있다.

중국 견제에 나선 미국은 군사력을 증강하고 일본도 미국을 등에 업고 재무장에 본격 나서고 있다.

불행히도 지금의 모습은 구한말 상황과 너무나 유사하다.

그럼에도 한국사회는 온통 분열주의로 탈출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

구한말 러시아가 득세하면 친러파, 청나라가 입김이 세지면 친청파로 돌아서고, 일본이 강해지자 친일파로 돌아서서 나라를 팔아먹었다.

다시 미국이 부상하자 친미파가 득세했다. 시세의 흐름에 빠른 이 기회주의자들이 엘리트층이었다.

도덕성이 함께 갖추어졌었다면 이들이 애국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엘리트 계층은 그렇질 못했다.

이들은 친일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친일역사가 한국을 근대화시켰다고 미화를 하고 있다.

우리는 ‘한국이 어리석다’고 했던 아베 총리의 말에 분노만 할 게 아니다.

냉정하게 우리를 되짚어 보고, 눈 똑바로 뜨고 역사를 곱씹어 봐야한다.

그리고 일본 우익은 한국이 강제징용 배상금을 청구하면 일본은 한국을 금융공격으로 무너뜨려야한다고 대놓고 말한다.

일본은 장기불황, 대지진, 등에 의한 사회경제적 불안과 불만을 풀어낼 출구가 절실해졌다.

이에 아베는 ‘강한 일본’을 내세우고 군국주의 부활을 실현해 가고 있다.

문제는 단순한 주장이 아니라 치밀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준비해 간다는 사실이다.

강한 국가는 강한 군대를 가져야한다는 명확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야욕을 드러낼 때마다 ‘평화’를 전면에 내세웠다.

임진왜란 당시도 무장집단이 지배층이었고 메이지 유신의 지배 계층도 무장세력이었다.

강한 일본은 군사력에서 나왔고 그 달콤함에 다시 취하고 싶은 일본이다.

특히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실제 일본이 침몰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주었다. 

잃어버린 20년은 강한 보수정부 아베를 낳았다.

아베는 일본 경제부흥을 위해 아베노믹스를 선포하고 무제한적 양적완화 정책을 폈다.

돈을 마구 찍어서 경제를 살린다는 극단적 처방을 선택한 것이다.

양적완화는 경기부양을 위한 마지막 처방이다.

현재는 가시적으로 성공적인 정책처럼 보이고 있지만, 일본은 국가 채무가 GDP대비 300%를 육박하고 있다.

언제 이 버블이 폭발할지 모른다. 일본 경제의 몰락은 세계경제 공황의 도화선이 될 것이다.

아베노믹스가 실패를 한다면 일본뿐 아니라 세계경제는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가게 된다.

결국 일본은 눈을 돌려 폭발 직전의 내부문제를 밖으로 쏟아내며 해결할 것이다.

본으로서는 최악의 타개상황을 준비해야한다.

그래서 왜곡된 군국주의 과거사를 국민에게 세뇌시키고, 독도 분쟁화에 가속도를 붙이는 이유이다.

 

중국 팽창에 대한 미일 동맹강화, 남북한의 긴장 고조는 한반도를 극도의 불안 속으로 몰고 있다.

일본은 외부 침략을 통해서 생존과 발전의 길을 찾아내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임진왜란이 그랬고 19세기 정한론이 그랬다.

내부 위기감이 쌓일 때마다 어김없이 외부 침략논리를 만들어 국민을 단결시키고 강력한 리더십을 동원해서 전쟁을 벌였던 것이다.

일본은 전쟁준비가 끝나면 침략전쟁의 속셈을 여과 없이 드러내 왔다.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로 굉장한 배상금으로 군비를 확충하고 산업기반을 조성해 부국강병의 기초를 놓았다.

세계자본주의는 전쟁을 통한 약탈로 쌓아올린 부이다.

전쟁을 수반하기 위해 식민지배 국가와 약소국에서 엄청난 자원을 수탈해갔다.

일본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엄청난 부를 축적한다.

유럽이 전운에 휩싸이자 엄청난 군수 보급국으로 변신을 했다.

1929년 덮친 세계공황을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돌파해 나갔다.

일본은 근본적으로 무력을 이용한 착취와 수탈이 경제부흥의 발판이었다.

 

이제 일본은 전쟁을 할 수 있는 국가로 부상을 했다.

한국전쟁은 전후 패망한 일본경제를 회복시켜주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한국에 대한 영토 도발, 역사 왜곡을 보면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분쟁일상화 전력이 숨어있다’라고 볼 수밖에 없다.

한반도는 화약고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식민사학의 노예가 돼서 친일을 찬양하는 지식인이 많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사실을 왜곡하고 자기식 억지로 포장된 과거사는 역사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일본인이 만든 한국사를 배우고 있다.

아베는 3차 정한론을 가지고 신일본제국, 아시아 중심을 자처할 것이다.
일본우익은 “일본의 식민통치가 한국에 유익했다”라고 말한다.

유럽제국주의가 중남미를 식민지 삼고 약탈, 살인, 강간, 강제 개종을 시키고 우리는 그들을 문명세계로 개화시켰다고 하는 주장과 비슷하다.

제국주의는 약육강식의 강자의 논리이지 정의의 논리가 아니다.
잘 사는 게 정의라고 말할 수 있는가?

 

다음은 1912년 《아사히 신문》에 실린 사설이다.

“1945년 8월15일 일본 진주 미군이 일본을 병합하고 미국의 주로 만들었다”라고 전제한 후 “미국이 일본에 좋은 일을 했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겠느냐”고 질문했다.

그러자 일본은 간섭하는 미국에 대해 “절대로 감사할 수가 없다”라는 한 사설이다.

 

그러면 우리나라 사정에 그대로 적용을 해본다.

‘미국은 민주주의를 가르치며 일본을 강제 병합한다.

영어로 교과서를 배우고, 미국의 역사를 공부한다. 일장기 대신 성조기에 충성을 맹세하고 미국의 국가를 부른다.

이름도 미국명으로 개명 한다. 일본사람이 미국 병사로 전쟁에 나가고 일본의 독립운동을 탄압하며 수천, 수만의 동포를 살해한다.

이렇게 해서 미국이 일본인의 고혈을 짜내고 “일본을 발전시켰으니 감사해라”고 하면 과연 일본 기분은 어떤 기분일까.

역지사지라는 말은 한국에만 있는 사자성어가 아니다.

 

한국은 식민사학을 청산해서 정의의 역사로 바로 잡을 때 한국사회의 심각한 지도층의 부패와 도덕성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더 이상 한국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 4차 산업혁명을 이끌어가기 어렵다.

국가를 발전시키는 힘은 역사문화의 저력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의 움직임을 눈여겨보면서 한민족의 미래를 열어 나가야한다.

일본의 재무장과 군국주의 부활, 독도 침탈과 역사 왜곡 그리고 한국의 뉴라이트 부활과 식민지 근대화론을 지지하는 식민사학,

그리고 민족사학을 무너뜨리기 위해 ‘유사역사학’, ‘사이비 역사학’이란 극단적이고 혐오스러운 언어를 써가며 민중으로부터 민족사학을 분리시키고 자신들의 이익을 옹호하려 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무엇이 보이는가?

일본 군국주의 부활-일본, 다시 침략을 준비한다①

진실의 역사

일본 군국주의 부활-일본, 다시 침략을 준비한다

2014년 4월 22일 일본 각료와 국회의원 168명이 제국주의 침략전쟁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를 집단적으로 참배했다.

“전쟁에 목숨 바친 영령을 높이 받들어 숭배하는 것은 종교의 자유다. 내정간섭을 말라.”

극우세력은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보는 앞에서 당당하게 신사참배를 강행했다. 

‘강한일본’을 외치는 극우파에게 박수가 쏟아진다. 언론도 우경화를 부추긴다.

일본이 마음만 먹으면 한나절 안에 한국을 접수할 수 있다는 극언도 쏟아져 나왔다.

이를 보고 일본정세에 밝은 일부 지식인은 “이미 침략이 시작 됐다고 말한다.

 

임진왜란과 한일병탄 때처럼 무력을 앞세운 침략이 아니라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소리 없는 전쟁,

즉 ‘경제침략으로 한국을 삼킬 것이다’고 본다.

지금은 역사 속 일본 침략기와 오늘이 너무나 닮아 있다.

1592년 임진왜란과 1910년 한일병탄시기 모두 오늘의 한국 및 국제 정세와 너무 비슷하다.

 

임진왜란 직전 조선은 동인과 서인으로 당파가 나뉘어 사사건건 분열했다.

한일병합 이전 조선은 분열이 더 심했다.

개화파와 쇄국파의 정변은 나라를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그러면 오늘의 한국은 어떠한가. 먹고사는 문제 말고 분열상은 과거와 다르지 않다.

진보와 보수, 남북분단, 동서지역감정, 이념갈등 등 자기 단체의 이익만 있고 공동의 선은 없다.

 

이런 국내 흐름을 보고, 일본 우익은 “한국은 원래 홀로 설 수 없는 나라”라고 비아냥거린다.

식민사관이 판을 치고 자주독립사관이 무너진 한국은 침략하기 딱 좋은 사회 환경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20여년의 장기 침체와 리더쉽 부재 속에서 아베 총리는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며 강한 일본을 만들겠다고 일본 일체화에 열을 올리고 있다. 아베의 얼굴에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모습이 깃들여져 있는 것이다.

아베는 “나를 군국주의자로 불러도 좋다”라고 선언했다.

일본의 복잡한 내부 사정을 외부로 표출시킨 과거 군국주의는 우리에게 엄청난 민족적 상처를 남겼다.

군국주의 무장이후 첫 실천대상은 늘 가장 가까운 한국이었다.

최근 일본의 비정상적 움직임을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중요한 점은 일본이 군국주의로 무장할 때마다 우리나라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는 사실이다.

 

임진왜란 당시 10만양병설은 묵살됐고, 19세기 조선은 쇄국을 고집하다 나라를 잃었다.

임진왜란, 한일병탄에 이어 한국을 정벌하겠다는 3차 경제 정한론은 이미 시작됐다.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를 보자.
일본은 독도를 놓고 끊임없이 도발에 나선다. 시비를 넘어 자기 영토라고 선언했다.

독도를 분쟁의 씨앗, 침략의 촉매로 삼고자 함이다.
일본이 분쟁 희생양을 잡는다면 당연히 중국보다는 한국이다. 그리고 그 대상은 독도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은 명나라를 치러 가니 길을 비켜달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한일병탄 때도 중국을 먹기 위해 조선을 밟고 갔다.

우리나라를 둘러싼 미.일.중.러의 신경전도 한일병탄 때와 유사하다.

 

미국은 이제 일본을 내세워 중국 팽창을 저지하고 있다.

친일파는 영원히 영속을 하며 부귀를 누리리라는 희망으로 가슴이 벅차오를 것이다.

미국은 일본의 집단 자위권 행사를 인정하고 방위력 증강에 찬성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미국도 도덕과 정의보다는 철저히 미국 국익을 선택한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

전범국가를 파트너로 삼고 있는 미국, 그리고 피해국가를 오히려 정복하도록 방조하고 있는 미국을 보라.

 

일본은 북한과의 밀월관계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일본은 정말 외교 하나는 제대로 하고 있는데 한국은 사교에 머무르고 있다.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 대가로 일본은 피해액 3억 달러를 지불했다.

북한에는 300억 달러를 지불하겠다고 한다. 일명 원산 프로젝트다.

임진왜란과 한일병탄시절, 때를 놓쳐 나라가 만신창이가 된 것처럼 21세기 한국이 돌이킬 수 없는 위험에 노출되지 않았는지 철저히 점검해야 한다.

 

다음은 아베 총리의 말이다.

“한국은 그냥 어리석은 국가이다.”
“중국은 어처구니없는 나라지만 아직 이성적인 외교게임이 가능한 반면 한국은 그냥 어리석은 국가”라고 말했다.

16세기말 토요토미 히데요시도, 19세기말 정한론을 주장했던 후쿠자와 유키치도 그렇게 말했다.

 

문제는 21세기 일본지도자가 여전히 한국을 어리석은 국가라고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베총리는 어리석은 한국을 교화하기 위해 반드시 침략한다는 정한론 유전자의 소유자이다.

 

다음은 조선의 마지막 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유키가 조선을 떠나면서 남긴 마지막 말이다.
“우리는 실패했지만 한국이 승리한 것은 아니다.

장담하건데 한국이 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한국인에게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놓았다.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조선은 실로 위대했고 찬란했으며 찬연했지만 한국은 결코,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아베 노부유키의 말대로 지금 한국에서 벌어진 역사전쟁을 보면서 이미 식민사학이 사회 깊숙이 뿌리내렸음을 보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일본의 아베총리에서 아베 노부유키의 부활이 보이지 않는가?

 

지금 한국에서는 도종환 의원 문체부 장관 지명을 둘러싸고 역사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독립운동가들이 지향하던 민족사학과 사대주의자들이 지향하던 식민사학과의 대전쟁이다. 

강단사학에서는 도종환 의원의 역사관을 가지고 “유사역사학”, “사이비역사학”에 경도되었다며 강대한 역사를 주장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국수주의, 민족주의 사관이라고 파상공세를 가하고 있다.

그러면 있는 역사와 영토를 줄이는 것이 세계주의사관이란 말인가.

 

이들은 민족을 이야기하면 이상하리만큼 경도된 반응을 일으킨다.

그러면서 ‘국뽕’, ‘국수주의’로 몰아가면서 민족사학을 매도한다.

이러한 이유는 그들의 뿌리가 민족을 배반한 친일식민사관의 후예들이기 때문이다.

동경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1973년 미 펜실베니아대에서 국제 정치학과 역사학으로 박사를 받았으며 하버드대에서 동아시아 국제 관계를 전공한 이홍범 박사는 강대국의 흥망성쇠의 원인을 역사학적으로 분석하면서 한국의 역사학의 현주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따끔한 지적을 했다.

 

역사가 망하면 민족은 멸망합니다. 우리 민족이 망하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외래 종교 역사관이 ‘단군은 신화다’ 해서 한민족 민족사관을 파괴해서 자주 민족통일을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걸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민족의 귀중한 역사관을 가지고 민족 자주와 통일 번영을 이루기 위해서 홍익역사관으로 조국의 통일을 이룩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 사사건건 반대하면서 민족사관을 패배시키는 세력들이 이 땅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 세력이 소위 강단사학입니다.

외래 식민사관이 방해하고 파괴하고 그러면 결국 약한 민족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역사투쟁, 역사전쟁 중에 있습니다.

군사경제는 쉽게 알아보지만 보이지 않은 역사관은 역사 통찰력이 없으면 보기가 어렵습니다.

외래사관이 구원이든 사랑이든 평화든 경제번영을 사용하고 실증적인 용어를 들고 나오기 때문에 일반적인 사람들은 밑에 흐르는 진리정신을 통찰하기 쉽지 않습니다.

위대한 민족만이 역사정신권력을 만들어 세계사에 군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8천만 민족을 통합하는데 실패한다면 우리는 머지않아 멸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공을 한다면 영광스런 조국통일을 이루고 세계 선진대국이 될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현몽으로 임진왜란을 막은 이순신

서프라이즈

현몽으로 임진왜란을 막은 이순신 - 이순신 장군과 신명(神明)에 관한 이야기

 

크고 작은 일을 물론하고 신도(神道)로써 다스리면 현묘불측(玄妙不測)한 공을 거두나니

이것이 무위이화(無爲以化)니라. (道典 4:5:1)
 
이순신은 임진왜란에서 일본 수군을 상대로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거북선의 눈부신 활약과 함께 한산대첩, 명량대첩 등에서 뛰어난 전법이 승리의 주요 원인이었다.

거북선 고안에서부터 전략 전술에 이르기까지 이순신의 뛰어난 능력과 지혜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꿈에 거북을 보고 거북선을 고안하다.

 

신묘(辛卯 1591)년 47살의 이순신은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오른다.

이순신은 왜침을 예상하고 미리부터 군사를 훈련하고 장비를 갖춘다.

특히 거북선을 제조하여 전쟁에 대비한다.

어느 날 이순신은 나랏일로 고심하다가 잠이 드는데, 이 때 거북선 고안의 단초가 되는 신기한 꿈을 꾼다.

나는 병사들에게 먹일 식량을 찾아 바다로 나갔다. 무척이나 먼 곳까지 노를 저어 왔지만 아무 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거대한 거북이 바다에서 솟아올랐다.
 
나는 식용으로 쓸 요량으로 거북을 잡기 위해 화살과 무기를 총동원했다.

그러나 노력도 헛되이 도무지 내 손으로는 거북을 잡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거북의 입에서는 불이 뿜어져 나왔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놀라 잠에서 깨어난 이순신은 거북 모양으로 생긴 특수한 전함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거북선은 두꺼운 나무판을 높히 이어 붙인 다음 그 위에 튼튼한 철갑을 둘러 만들어졌다.

또 거북선의 뱃머리는 용머리처럼 생겼는데, 그곳을 통해 대포가 발사되고 유황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임진(壬辰, 1592)년 5월, 사천해전이 발발하기 이틀전의 일이다.

5월 27일 밤에 잠시 눈을 붙이고 있던 이순신은 신비로운 꿈을 꾼다.

 

꿈속에서 신령님 같은 노인이 나타나 이렇게 외쳤다.

“일어나라! 왜적이 나타났다.”
이순신은 벌떡 일어났다. 이 때, 경상우수영으로부터 도와달라는 급한 보고가 날아들었다.

5월 29일 새벽, 거북선을 앞세운 이순신의 함대는 사천을 향해 기운차게 진격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3일간의 해전 끝에 왜군 함선 13척을 격침시키고, 왜군 2,600여 명을 사살한다.


노모의 죽음을 알리는 꿈을 꾸다.

정유(丁酉, 1597)년 1∼2월에 일본은 대군을 동원하여 조선을 다시 침략해온다.

정유재란이 발발할 즈음 이순신은 누명을 뒤집어쓰고 파직 당한다.

 

서울로 잡혀 올라온 이순신은 옥에 갇혀 한 차례 고문을 받는다. 다행히 풀려나지만 백의종군하라는 명을 받는다.
이순신은 금부도사에게 이끌려 도원수 권율이 있는 경남 합천의 초계로 내려가게 된다.

그러던 차에 순천으로 피란갔던 83세의 노모가 배를 타고 올라오다가 끝내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접한다.
 
노모가 숨을 거두던 그날, 이순신은 불길한 꿈을 꾼다. 그리고 이틀 후 부고를 듣는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4월 11일〕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몹시 번잡스러워서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덕’을 불러 대강 이야기하고, 또 아들 ‘울’에게 이야기하였다.

마음이 몹시 언짢아서 취한 듯 무엇에 홀린 듯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으니 이 무슨 조짐일까.

병환 중인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종을 보내어 어머니의 소식을 알아오게 하였다.
 

〔4월 13일〕 조금 있자니 배에서 달려온 종 순화가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방을 뛰쳐나가 슬퍼 뛰며 뒹굴었더니 하늘에 솟아 있는 해조차 캄캄하였다.
 
이순신은 비통한 심정으로 시신을 집으로 모셨다.

그러나 조정의 명령을 어길 수 없다는 금부도사의 재촉에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장대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합천으로 향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이순신은 또다시 꿈을 꾼다. 그리고 꿈속에서 죽은 형님들을 만난다.
 
〔5월 6일〕 꿈에 돌아가신 두 분 형님을 만나 서로 붙들고 울었다.

형님들이 말씀하시기를 “장사를 지내기도 전에 천리 밖에서 종군하고 있으니, 누가 일을 맡아서 한다는 말이냐?

통곡을 하더라도 어떻게 할 것인가?”하셨다.

두 형님의 혼령이 천리 밖까지 따라오셔서 이와 같이 근심하고 걱정하시니 슬프고 마음이 아파 견딜 수가 없다.

꿈에 신인이 나타나 전술을 알려주다.

후임 통제사 자리에 올랐던 원균이 7월 칠천량 전투에서 대패하고 자신도 전사한다.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빠지자 이순신은 8월 초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다.

장군은 9월 16일 겨우 12척의 함선을 이끌고 출동,

서해로 향하는 133척의 일본전선을 명량해협(울돌목)의 거친 물살을 이용해 대파한다.
 
명량대첩 직전에 이순신은 전투의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꿈을 두 차례 꾼다.

신령스럽게도 꿈에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적군의 행적과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전술을 예지해 주었다.

 

이순신은 꿈이 의미하는 바를 생각해보고, 또 꿈에서 계시 받은대로 실전에 임한다.

그리고 대승을 거둔다. 이순신은 당시의 상황을 난중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9월 13일〕 매우 이상한 꿈을 꾸었다. 
임진년 승전했던 한산대첩 때 꾸었던 꿈과 흡사하였다. 이는 무슨 징조일까?

 

〔9월 15일〕 여러 장수들을 불러모아서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꿈에 신령스런 분이 나타나서 이렇게 진을 치고 저렇게 군사를 배치하면 크게 이길 수 있으나 달리하면 질 것이라고 가르쳐주셨다.
 

9월 16일〕 곧바로 명령을 내려 적장 ‘마다시’를 토막토막 잘랐더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적선 31척을 깨뜨리자 적선은 도망하고 다시는 우리 수군에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이번 일은 참으로 하늘이 도우셨다.

 

조선의 형세가 누란(累卵)과 같이 위급하다보니 아마도 천상의 조선신명들 사이에 비상이 걸렸었나보다. 
그리고 충심어린 이순신에게 조선을 구할 묘책을 계시한 모양이다.

즉, 국난이 닥치자 천상의 신명과 지상의 인간이 함께 역사하여 이를 수습한 것이라 판단된다. 
 

〈참고서적〉
이순신의 『난중일기』 (서해문집, 2004)
디어더 배럿의 『꿈은 알고 있다』 (나무와 숲, 2003)
 
거북선에 대한 기록은 『태종실록』에 처음 보이며, 이후 이순신에 의해 철갑선으로 개발, 창제되었다.

거북선 제작연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난중일기』에 따르면 거북선에 비치한 포(砲)를 처음 발사한 날은

임진왜란 발발 한달 전인 1592년 3월 27일, 장계(狀啓, 지방관원이 임금에게 올리는 보고서)에 따르면

처음 해전에 참가한 것은 5월 29일 사천해전이라 하였다.

 

거북선은 최초의 돌격용 철갑선으로 서양보다 무려 250년이나 앞섰다.

미국 워싱톤의 전쟁기념관(War Memorial Museum), 영국 해사박물관(Maritime Museum), 중국, 독일, 불란서, 캐나다 등

세계 각지의 역사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송구봉의 ‘구선도’를 보고 거북선을 제조하다.

 

이순신의 거북선을 둘러싸고 또 다른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순신에게는 송구봉이라는 스승이 있었다.

그는 비록 서출이었지만 학식과 인품이 높아 많은 이들이 따랐다.

 

이순신이 12,3세 때 친구들과 돌을 모아놓고 진법 연습을 하고 있었다.
송구봉이 그걸 보고 있다가 집에 다녀가라고 했다.

그래서 이순신은 밤에 송구봉의 집에 갔는데, 그는 방에 누워 있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이순신은 송구봉의 방에서 구선도(龜船圖)를 보고 집에 왔다. 송구봉이 묵언으로 교지한 것이다.
 
세월이 한참 흐른 어느 날, 이순신은 여수 수사로 와서 여수 둔덕재의 솔을 가지고 거북선을 만들었다.

배를 만들었는데 여덟 개의 구멍 중 한 개의 용도를 몰라 송구봉에게 다시 가서 여쭈어보았다.

그랬더니 그 구멍은 사청목(巳聽目)이라 했다. 뱀은 눈으로 소리를 듣기 때문에 바깥의 말을 듣기 위해 한 구멍을 놔둬야 했다.
 
송구봉이 비범한 인물임을 이 이야기를 통해서도 짐작해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구봉(龜峰)이란 호의 거북 구(龜)자가 이순신의 거북선과도 전혀 무관하지 않았으리라.

이순신이 임진왜란에서 승리한데는 이처럼 숨은 공로자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