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세조실록'에 해당되는 글 2건

  1.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역사서의 저자들
  2. 삼성기 하의 저자 원천석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역사서의 저자들

진실의 역사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각 역사서의 저자들

안함로와 원동중의 『삼성기』에 대해서는 『세조실록』에 명확하게 등장한다.

팔도관찰사八道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한 내용 중에 “안함로원동중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라고 하여 안함로와 원동중의 『삼성기』를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위서론자들은 70여 년 후에 쓰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안함安咸·원로元老·동중董仲’ 세 사람이 황해도 해주 수양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삼성기』의 저자를 안함로, 원동중 두 사람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 주장한다.

따라서 진서론에서 전거로 사용하는 『조선왕조실록』의 ‘안함로원동중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라는 기록이 잘못되었으니 ‘안함·원로·동중의 삼성기’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얼핏 일리 있는 말로 들리지만 이 주장에는 커다란 모순이 있다.

일반적으로 책을 인용할 때 앞서 나온 책을 인용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이 경우는 『세조실록』을 기록하는 사람이 70여 년 후에 쓰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인용하였다는 상식 밖의 주장으로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

그리고 『세조실록』에서는 저자가 세 명 이상일 경우 ‘문태, 왕거인, 설업 등 세 사람이 쓴 책’이라고 사람 수를 명시하였다.

즉 이름을 나열할 때 몇 사람인지 혼동이 생길 여지가 있으면, 몇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안함로와 원동중 두 사람이 『삼성기』를 저술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안함安咸’은 『세조실록』에 나오는 ‘안함安含’과 독음만 같을 뿐 글자가 다르다.

더욱이 『왕조실록』은 정확성을 요구하는 정사正史이므로 기록자들이 ‘안함安含과 안함安咸’, ‘로원老元과 원로元老’를 잘못 기록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따라서 이들을 동일 인물로 보기 어렵다.

일반적으로 문헌고증을 할 때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하는 부분에서 오류를 범하며 견강부회牽强附會를 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삼성三聖이 아니라 삼인三人이라 기록하고 있으므로, 삼성三聖과 삼인三人을 같은 의미로 보는 것은 억측일 뿐이다.

설혹 『세조실록』 에 있는 해당 기록을 ‘안함, 로원, 동중이라는 세 성인에 대한 기록’으로 해석한다고 하더라도, 수양산성을 쌓은 세 사람을 과연 성인聖人이라 볼 수 있는 어떤 증거도 없다.

만약 성인으로 기록할 정도라면 기록역사를 자랑하는 조선에서 이 인물들의 업적이 없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성인 정도라면 그들의 행적에 대한 책이나 가르침이라도 전수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원동중의 삼성기가 실재했다는 또 다른 증거는 이맥의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 ‘원동중元董仲 삼성기三聖記 주注’라는 대목이다.

이것을 보면 이맥이 원동중의 『삼성기』에 주注가 달린 책을 보고 『태백일사』를 저술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위서론자들이 말하는 ‘안함·원로·동중의 세 성인에 대한 기록’으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은 오로지 비판을 위한 비판으로밖에 볼 수 없다.

따라서 ‘안함로원동중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는‘안함·원로·동중 세 성인의 기록’이 아니라 ‘안함로, 원동중의 삼성기’인 것이다.

또 위서론자 이순근은 구한말에 나온 도기론道器論이 『단군세기』에 나오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주역』에는 이미 “형이상자위지도形而上者謂之道 형이하자위지기形而下者謂之器”라는 문구가 나온다.

도기론은 이에 근거해서 도道와 기器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또한 이순근은 “당대當代의 왕을 상上이라고 하면서도 자기 나라를 고려라 칭한 것도 이해할 수 없는 표기법이다. 이 경우는 아조我朝, 본조本朝, 혹은 아국我國 정도로 표현해야 옳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단군세기』를 고려 때 이암이 아니라 후대에 다른 사람이 지은, 사료적 가치가 없는 위서로 몰았다.

 

그리고 서울대 국사학 교수를 역임한 한영우 또한 “또 한 가지 결정적 의문은 고려高麗니 몽고蒙古니 하는 용어다. 공민왕 시기의 당시 사람들은 고려니 몽고니 하는 용어를 쓰지 않았다. 더욱이 원나라 간섭기에 대신을 지낸 행촌의 입장에서는 쓸 수 없는 용어다”라고 하여 저자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이암이 고려와 몽고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선가의 의식과 유가의 의식의 차이’를 들어 이해할 수 있다.

『청학집』을 보면, 조선조 유가에서 잘 사용하지 않던 조선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도가나 선가에서는 일상적으로 우리나라 또는 우리 민족의 의미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단군세기』 서문이나 본문을 읽어 보면 이암의 사상적 경계는 유가보다는 오히려 한민족 신교문화의 전통 도가 쪽에 가깝다.

따라서 이암이 아국이라 하지 않고 고려나 몽고라 호칭한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단군세기』 서문은 논리가 매우 치밀한 글이다.

이암은 ‘국유형하고 사유혼하니’라는 구절을, 그 논리를 마무리 지을 때까지 세 번이나 반복한다.

『단군세기』 서문을 제대로 해석하려면, 이암이 이 글을 쓰던 당시의 시대 배경을 알아야 한다.

12세기 초엽에 원나라는 세계의 3분의 1을 점령한 대제국을 건설했고, 고려는 원의 부마국이 되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한 채 내정간섭을 받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오잠, 류청신 같은 역적이 나와서 고려라는 나라 이름을 없애고 원나라의 속국이 되기를 주청했다.

 

이렇게 국운이 기울어져 고려 5백 년 사직이 패망당할 통탄스러운 상황에서, 행촌은 동북아 창세 시대의 뿌리 종교이자 시원 사상인 신교의 핵심인 ‘삼신의 우주사상과 인간론’을 전하면서 위정자들에게 매서운 질타를 한 것이다.

조정에는 만고역적이 들끓고, 역사상 가장 큰 영역을 차지한 원나라의 침략으로 망해 가는 조국의 허망한 현실에 비분강개하여, 신교문화와 시원역사의 부활을 절규하며 글을 쓴 것이다.

 

또한 이암은 『단군세기』 서문에서 마음의 근원과 신의 상호관계를 명쾌하게 정의한다.

그 중에서 성자性者는 신지근야神之根也 즉 ‘인간 마음의 바탕 자리는 신이 존재하는 뿌리가 된다’는 구절은 인간과 신의 관계에 얽힌 수수께끼를 완전히 풀어 주는 깨달음의 극치를 보이는 문장이다.

그것은 공자의 중용, 석가모니의 중론보다 훨씬 위대한 말씀이며, 환단의 천지 광명 사상을 활연관통한 사람이 아니면 결코 쓸 수 없는 간결한 명문이다.

 

한영우는 또 『단군세기』에 나오는, 초대 단군왕검이 백성에게 내려 준 생활 실천 과제라 할 수 있는 ‘팔조금법八條禁法’의 문장이 간결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단군세기』를 이암이 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단군왕검이 고조선 창업자로서 백성들에게 삶의 지침으로 여덟 가지를 정해서 내려 준 것을 놓고 문장이 길다고 트집을 잡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단군왕검의 가르침은 그 구성과 체계가 매우 논리정연하다.

그래서 이도학은 위서론자이면서도 『단군세기』 서문을 분석하는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단군세기』를 이암이 아닌 다른 사람이 쓴 것이라고, 거짓으로 몰면 안 된다’고 결론지었다.

 

이처럼 사리에 맞지 않게 문제를 제기하는 위서론자들의 무지몽매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가 있다.

그것은 『환단고기』를 위서로 몰아붙이면서 저지른 결정적인 실수인데, 바로 ‘잠청배潛淸輩’라는 문구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다.

 

잠청배는 원래 이암이 『단군세기』 서문에서 처음으로 쓴 말이다.

고려의 역적이었던 오잠과 류청신의 이름을 빗대어 ‘오잠과 류청신과 같은 간신배’라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이것을 위서론자들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 땅에서 청나라를 몰아낸 일본이 ‘청과 몰래 내통한 무리’를 가리켜 한 말이라고 잘못 해석하였다.

역사의 상식에 무지한 소치이다.

이렇게 잠청배를 잘못 해석한 그들은 잠청배가 조선 말기에 나온 말이므로 『단군세기』 서문은 이암이 아닌 구한말 이후의 사람이 쓴 것이라는 억지 주장을 한다.

 

이승호는 이러한 잘못에 대하여 “(위서론자들의) 이런 오류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인데 특정한 시각이나 목적으로 『환단고기』를 이해한 것처럼 보인다”라고 말한다.

즉 위서론자들이 위서로 낙인찍기 위한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환단고기』를 해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이처럼 위서론자들은 『환단고기』의 가치를 파괴하고 훼손하기 위해 어떤 무리한 비판도 불사한다.

이러한 예만 보아도 위서론자들이 식민사학의 변론자로서 동북아 원형 문화의 눈을 가리는 반민족적 행태를 얼마나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는지 새삼 절감하게 된다. 《환단고기 역주》

삼성기 하의 저자 원천석

진실의 역사

三聖記(삼성기) 下의 저자 元天錫(원천석) 그의 자취를 찾아서

<무학대사가 잡아준 耘谷(운곡) 元天錫(원천석) 의 묘 : 원주 판부면>의 전설

무학대사(1327년 고려충숙왕 14년생)는 운곡 원천석의 묏자리를 잡아준 것으로 전한다.

“耘谷(운곡)[元天錫(원천석)의 호]은 어느 것을 원하시오? 했다.
재물과 벼슬이 후손들에게 넉넉하기를 바란다면, 의당 그곳 만대 영화지지요.

다만, 그저 탈 없이 평화롭게 살기를 바란다면 앞에 보이는 봉요혈(蜂腰穴)이 적격이올시다.“
“봉요혈”, 벌의 허리에 해당하는 혈자리인 것이다.

금방 끊어질 듯 가늘지만 그렇게 쉽게 끊어지지 않는 진혈의 허리다. 용맥이 흐르다 순간 결지를 했으니 기룡혈이다.

 

원래는 무학대사가 3대 정승이 나는 자리를 쓰겠느냐 아니면 무탈하게 자손들이 입신양명을 못하더라도 번창하는 자리를 쓰겠느냐 해서 이 자리를 택했다고 전해진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 혈자리다. 귀석이 주변에 있어 기의 누수를 막고 있다.

치악산의 한 자락이 서남향으로 흘러내린 끊어질 듯한 기맥은 잘록한 목을 지나 본신 안산을 이루며 당판을 단단히 일으킨다. 

벌허리처럼 끊어질듯한 이 자리에 쓴 이유는 고려말 망국의 상흔과 조선 유교국시에 실망하고 출사를 하지 않은 원천석 선생의 소망을 이 혈자리에서 염원한 것은 아닐까.

한민족 국혼과 고유역사가 사라져 가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역사관이 분명했던 태종 이방원의 스승이자 고려말 충신 72두문동 현인의 한사람이었던 원천석은 사라져가는 조선의 역사를 『삼성기』 하를 집필함으로써 이렇게 이어 주었다.

마치 자신이 묻힌 봉요혈 자리처럼 말이다. 허리가 끊어질듯하면서 생명을 이어가는 풍수학의 절미를 보여주는 이 봉요혈 혈자리처럼 말이다.

후손 중에 똑똑한 인물이 나와 벼슬길에 오르는 것을 마다하고, 그저 순탄하고 평화스러운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원주 원씨 중시조 원천석선생이다. 인문과 역사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당대의 영화를 구하지 않았다.

 

혈지에 대하여 대화를 나눈 인물은 무학대사였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사건의 배경이다.

원천석은 고려말의 인물이다.

고려말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스스로 탄식하며 원주 치악산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공양했다.

정계 중심에서 한순간 운명이 바뀐 상황을 그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자신을 정립하기 위함이다.

마치 고려말 망국의 패운을 통탄하며 단군세기를 강화도에서 집필한 행촌 이암은 먼 미래를 보며 단군세기를 남긴다.

그도 같은 심정이었으리라. 그도 그런 심정에서 한민족 역사시원의 원형을 기록했으리라.

원천석은 호는 耘谷(운곡)이고 태종 이방원의 스승이다.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다. 

원천석은 춘추전국시대 晉(진)나라의 직필하던 사관이었던 董狐(동호)를 존경하여 자신의 필명을 董仲(동중)이라 하였다 한다.

의미를 해석한다면 동호란 인물에 버금한다. 그의 필명에서 사관으로서의 권력에 아부하지 않는 대쪽같은 중도심법을 엿볼 수 있다.

 

威勢(위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사실을 그대로 直筆(직필)하였던 곧고 충직한 사관이었다. 

동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실(史實)을 바르게 기록(記錄)했다하여, 董狐直筆(동호직필)이란 사자성어가 전한다.

고려왕조가 망하자, 그는 뒷담을 끼고 돌아보듯 쇄망을 나귀의 말발굽으로 짚어가며 한수 시를 읊조렸다.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조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가는 객이 눈물겨워하노라“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무학대사와의 만남이다. 어떻게 조선의 왕사가 고려의 충신과 한자리에서 앉아 있을 수 있었는가.
그것은 “충신은 두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운곡 원천석의 행동 때문이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스스로 선택을 하는 것이리라. 어떤이는 당대에 살고 역사에서 죽는 이도 있다.
왜 깊어질수록 역사적 삶을 선택하는지는 스스로 깨우쳐야 하리라.

 

일찍이, 이방원(태종)은 왕자시절 운곡 원천석에게 글공부 가르침을 받은 바 있기 때문에 이방원이 즉위한 후 중임을 하려고 원주에 자주 찾아 왔으나, 그때마다 산속으로 몸을 피하고 만나주지 않았다.

왕은 계곡에 있는 바위에 올라앉아 집을 지키는 할머니에게 선물을 주고 돌아갔다.
훗날 그 바위태종대(太宗臺)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운곡이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던 것은 고려왕조에 대한 충의(忠義)였음을 그가 남긴 “운곡시사(耘谷詩史)”라는 문집으로 짐작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시의 제목을 보면, 최영장군을 기리는 것과 우왕, 창왕이 신돈의 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다.

치악산에 은거하면서, 운곡은 여섯 권의 야사를 집필했다.

그는 죽음에 임하여 후손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이것을 가묘에 잘 간수하도록 하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후에 유언은 지켜졌으나, 증손자 때에 책의 내용을 살피다가 혼겁하여 태워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원천석(원동중)이 지은 삼성기 하가 세조실록에 전한다.

 

◉ 세조실록 - 사서수거령에 수거된 목록에 기록된 고유사서목록 (환단고기 고증)

팔도 관찰사(八道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
대변설(大辯說)·
조대기(朝代記)·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지공기(誌公記)·
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
안함노 원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


여차하여 그런 책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조정에서 알게 되면 멸문을 당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였기 때문이다.

이성계의 조선에 와서는 그 아들 되는 태종 이방원이 유교의 가르침 국시와 역사관이 맞지 않는다고 해서 서운관에 있었던 우리 전통 역사서를 다 불질러버렸다.

유교국시이념에 어긋나면 닉자처참匿者處斬이란 왕명이 기록돼 있다. 우리 고유사서를 숨긴 자는 목을 벤다는 것이다.

이게 조선왕조실록에 있는 기록이다. 그래서 역사사서를 가지고 있을 수도 없고, 읽을 수도 없었다.

머릿 속에 역사관이라는 것은 불교사관, 유교사관, 이것이 이조 오백년을 내려오면서 결국은 우리 역사를 일본에게 다 내주고 노예민족으로 전락을 했던 것이다.

주체성이 결여된 이런 사대주의 국시는 국난의 위기에 민족과 국가가 사분오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구한말 외세에 휩쓸리던 그 중심에 근대 역사의 문을 연 동학혁명 농민군들의 절규는 이러한 동방역사의 외세침탈에 대한 저항이자 국혼 부활의 외침이었다.

 

조선시대 유교국시에 어긋나면 斯文亂賊(사문난적)으로 잡혀서 죽임을 당해야 했던 것이다.

원천석은 무학대사와는 세살터울 아래이며, 나옹화상과는 열 살 차이가 난다.

“고려사”에 의하면,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등과 모두 금문책(金門策:과거)을 꿰뚫은 동문들이다.

고대문자나 고대사에 달인들이었던 것이다.

 

치악산에 들어간 것은 이성계가 위하도 회군할 무렵일 때였는데 그는 정치에 대한 회의감이 너무 강했다.

그가 누워 있는 묏자리는 무학대사의 선물이었다.

묏자리가 입향 방위가 풍수법상 하나도 어긋남이 없는 것은 무학대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선택했는가를 실감나게 보여 주고 있다.
형국으로는 포은 정몽주나 목은 이색의 산소보다 국세를 잘 맞추어 있다.

포은 정몽주는 속으로 정가 세상을 꿈꾸었다하니 땅은 사람의 마음을 읽어서일까.

천지는 진실을 알고 참된 자손에 복을 내리는가보다. 특히 ,이곳은 사세가 일품이라고 풍수사들은 입을 모아 칭찬한다.

백호 줄기의 산에 올라서 “봉요혈“을 내려다보면 마치 한 마리 벌이 꿀을 따먹기 위해 꽃 속으로 들어가는 형국처럼 생겼다.

조화치고는 너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원천석 생애의 청고한 삶과 가치를 풍수학에 소망을 담았으리라.

그는 한민족 역사의 부활을 염원하였음을 묏자리나마 말없이 깊은 뜻을 전하고 있는 듯하다.

운곡 원천석은 강원도 횡성 칠봉서원(七峯書院)에 제향되어 있다.

국말국초의 변동기에 그는 고려의 충정을 지키고자 한 조선초의 은사(隱士)였다.

그는 금문과 고서의 대가였다.

그의 사후 손자가 가묘를 개장했을 때 조선 유교사학하고는 대립되는 한민족 고유사서였다고 전한다.

원동중은 원천석이다.

당시 자신의 이름을 은닉하면서 동시에 대쪽같은 사관이었던 동호를 존경해서 필명을 동중이라 하여 자신이 원천석임을 알지 못하게 하여 자신의 후손이 후세에 멸문을 당하지 않도록 한 배려였음이리라.

원천석은 삼성기 하를 집필해 한민족 국통의 계보를 전하신 분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