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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역사를 바꾼 북방민족④-선비 돌궐 거란 거란

역사를 바꾼 북방민족④-선비 돌궐 거란 거란

진실의 역사

역사를 바꾼 북방민족

 

STEP2. 환단고기가 밝혀주는 북방민족의 기원

 

3. 선비와 돌궐 그리고 거란, 여진족


중국 수·당의 뿌리, 선비족

『후한서』에는 선비와 오환을 모두 동호東胡(번조선)의 후예라 하였습니다. 이를 볼 때 선비는 고조선에 속한 족속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선비족의 발상지를 『위서魏書』에서 대선비산大鮮卑山으로 꼽았는데, 이 대선비산이라는 산 이름에서 선비족이라는 족명이 생겨난 것으로 보입니다. 북흉노가 1세기말 멀리 중앙아시아 초원으로 떠나 버리자 흉노의 본거지이던 몽골 고원은 일시적으로 공백지대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흉노의 지배를 받았던 여러 유목 집단이 초원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전을 벌였고, 결국 선비족鮮卑族이 패권을 잡고 북방 지역을 통일하였습니다. 선비족의 기원은 고조선에 속한 동북 지방이었습니다. 중원에서 위진魏晉 제국이 붕괴하여 혼란에 빠지자 선비족이 그 틈을 이용하여 대거 남하하였는데 이로써 5호胡 16국國 시대가 열립니다. 5호 16국의 분열을 통일한 수나라와 그를 무너뜨린 당나라 역시 그 기원이 선비족에 있습니다.

 

己未四十年(기미사십년)이라 封皇弟代心(봉황제대심)하사 爲南鮮卑大人(위남선비대인)하시니라.
역주 재위 40년 기미(단기 712, BCE 1622)년에 아우 대심代心을 남선비국南鮮卑國의 대인으로 봉하셨다. 「( 단군세기」16세 위나단군)

甲寅三年(갑인삼년)이라 鮮卑山酋長們古(선비산존장문고)가 入貢(입공)하니라.
역주 재위 3년 갑인(단기 1487, BCE 847)년에 선비산鮮卑山 추장 문고們古가 공물을 바쳤다. 「( 단군세기」32세 추밀단군)

          

 

돌궐의 후예 터키

단군세기에는 돌궐계인 ‘강거康居’에 대한 기록도 나옵니다. 3세 가륵 단군이 지백특支伯特에서 강거의 반란을 토벌하였다는 것입니다. 지백특은 티베트를 가리키는데, 18세 동엄 단군 때 지백특 사람이 공물을 바치러 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조선의 활동 영역이 티베트 인근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동양 고대사와 서양 중세사에 큰 영향을 미친 민족인 ‘투르크Turk’족이 바로 돌궐突厥족입니다. 투르크족은 6세기 중반에 서쪽으로 카스피해에서, 동쪽으로 몽골과 만주에 이르는 광대한 유라시아 초원에 강력한 제국을 세웠습니다.

 

오늘날 터키Turkey라는 나라 이름도 바로 이 투르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돌궐족은 원래 몽골족 국가인 유연柔然에 예속되어 있었습니다. 이 돌궐족이 553년에 유연을 멸망시키고 돌궐 국가를 세웠습니다. 이후 돌궐의 후예들은 북방의 초원을 떠나 차츰 서진하여 이란 지역에 가즈나 왕조(975~1187)를 세우고, 11세기에는 동로마 제국으로 침투하여 셀주크 투르크 제국을 세워(1037)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를 지배하였습니다. 13세기의 마지막 해, 1299년에는 오스만 투르크 왕조를 세우고 14세기 말에는 발칸 반도까지 장악하였습니다.


요나라를 세운 거란
거란이 세운 요遼나라의 정사인 『요사遼史』 「세표世表」에 거란이 생겨난 유래에 대해 상세히 전합니다.

“흉노 모돈(묵돌)에게 패한 동호東胡는 선비산에서 보전하고 있었는데 선비씨라 하였다. 그 후 모용씨의 연이 선비를 파하자 그 부部를 나누어 우문·고막해·거란이라 하였다. 거란의 이름이 이에 비로소 생겨났다[後爲冒頓可汗所襲, 保鮮卑山以居, 號鮮卑氏. 旣而慕容燕破之, 析其部曰宇文, 曰庫莫奚, 曰契丹.]”라고 하였습니다.

 

동호는 BCE 2백 년경, 한 고조 유방을 굴복시킨 흉노의 대영웅 묵돌선우(묵특선우)에게 멸망당하여 오환산과 선비에서 숨어 보전하며 오환·선비족이 되었습니다. 이 선비족에서 거란이 나왔습니다. 고막해·거란족은 후세에 몽골족의 주축이 되었습니다.

 

거란 부족의 시조에 대해 『요사遼史』 「지리지地理誌」 영주永州 조에서는 “전설에 따르면, 한 신인神人이 흰 말을 타고 마우산으로부터 토하(노합하)를 따라 동쪽으로 갔고, 한 천녀天女는 푸른 소가 끄는 달구지를 타고 평지송림으로부터 황하潢河(황수=서요하)를 따라 내려왔다. 목엽산木葉山에 이르러 두 강이 합류하니 서로 만나 배필이 되어 여덟명의 자식을 낳았다. 그 뒤로 족속이 점차 번성해져 팔부로 나뉘었다[相傳有神人乘白馬, 自馬盂山浮土河而東, 有天女駕靑牛車由平地松林泛潢河而下. 至木葉山, 二水合流, 相遇爲配偶, 生八子. 其後族屬漸盛,分爲八部.]”라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보면 거란족이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옛 고리국稾離國 일대를 근거로 하여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고리국은 북부여 시조 해모수와 후북부여(졸본부여)를 세운 동명왕 고두막한이 태어난 고향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대진 때 오경五京의 하나인 서경압록부가 있던 바로 그 자리에 요나라의 도읍인 상경임황부(지금의 요하 상류 임황)가 자리 잡았는데, 이곳은 바로 옛 고리국의 중심부였습니다. 거란 역시 분명히 조선족(한민족)의 한 갈래입니다.


정리 역주자가 전해주는 말씀

☞ 훈족의 출현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서부에서 민족 대이동이 일어난 것과 거의 같은시기에 대륙의 동부에서는 또 다른 북방 민족에 의해 그에 못지않게 커다란 민족 이동이 발생하였다. 흉노와 선비족이 일으킨 이동의 파도는 유럽에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가져오고, 중국에 북방 민족이 중원을 장악한 5호16국 시대를 열었다. 또 한반도 남부와 일본에 기마민족의 정권을 성립시켰다.

한마디로 말해 동북아의 중심이었던 고조선의 문화적 자양분을 흡수하며 동북아의 북방에서 뻗어 나간 유목민의 대이동이 유라시아 대륙의 역사를 크게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환단고기 역주본 본문 321쪽)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

『환단고기』 「고려국본기」에서는 여진 사신의 말을 인용하여 여진의 선조가 고려 출신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금 나라의 정사인 『금사金史』 「세기世紀」를 보면 “금나라 시조의 이름은 함보函普인데, 처음에 고려에서 왔다[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라고 하였습니다.

 

또 『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금준 : 세상에서 전하기를, 옛날 평주의 승려 금준이 도망하여 여진으로 들어가 아지고촌에 살았는데 이 사람이 금나라의 선조라 한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평주중 금행金幸의 아들 극수克守가 당초에 여진으로 들어가서 여진 여자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아 고을古乙이라 불렀는데, 금나라 시조 아골타가 그 후손이다’라고 한다[今俊: 世傳, 昔有平州僧今俊, 遁入女眞, 居阿之古村, 是爲金之先. 或曰‘平州僧金幸之子克守, 初入女眞, 娶女眞女, 生子曰古乙. 金祖阿骨打, 乃其後也.’]”는 기록이 있습니다.

 

睿宗文孝大王四年秋(예종문효대왕사년추)에 撤九城(철구성)하야 還女眞舊地(환여진구지)하니라.
先是(선시)에 女眞(여진)이 使O弗史顯等(사요불사현등)하야 入朝奏曰(입조주왈) 昔(석)에
我太師盈歌(아태사영가)가 嘗言我祖宗(상언아조종)이 出自大邦(출자대방)하니 至于子孫(지우자손)하야 義當歸附(의당귀부)가 可也(가야)라 하더니 今太師烏雅束(금태사오아속)이
亦以大邦(역이대방)으로 爲父母之國(위부모지국)이러니 ......


역주예종 문효文孝대왕 4년(단기 3442, 1109) 가을에, 9성에서 철수하고 여진의 옛 땅을 돌려주었다. 이에 앞서 여진이 요불褭弗, 사현史顯 등을 보내 조정에 들어와 이렇게 상주하였다. “옛날에 저희 태사 영가盈歌께서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조종은 대국(고려)에서 출생하였으니 자손 대에 이르러서도 마땅히 귀부歸附함이 옳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태사 오아속烏雅束께서도 역시 대국(고려)을 부모의 나라로 삼고 있습니다. (「고려국본기」)

 

정리 역주자가 전해주는 말씀

☞ 흉노, 선비, 돌궐 등의 북방 민족에게는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신교 삼신문화의 천신天神사상이다. 흉노의 경우 선우는 천신의 아들로서 그 뜻을 지상에 펴는 제사장이며 대리자였다. 선우는 한나라 황제에게 보낸 문서에서 늘 자신을‘ 하늘이 세운 흉노 대선우’ 혹은‘ 천지가 낳고 일월이 세운 흉노 대선우’라칭하였다. 흉노인은 천신의 상을 만들어 받들었는데, 금으로 된 큰 신상을 모시고 하늘에 제사 지냈다는『한서』「흉노전」의 기록이 그것을 말해 준다. 또 흉노 사회에서는 주술과 의술을 겸한 무당이 있었다. 선비족이나 돌궐족도 이러한 흉노 사회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환단고기 역주본 해제 323쪽)

 

고구려가 망한 후 만주 지방의 말갈인은 고구려 복국 운동에 협력하였고, 대진(발해)이 성립되자 다시 대진에 예속되었습니다. 흑룡강 하류 지역에 살던 흑수말갈은 당唐과 결탁하여 대진 세력을 배제하려 하다가, 마침내 대진 3세 무황제에게 토멸 당해 150여 년간 종족의 이름조차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10세기 초에 대진이 거란에게 망하자, 남북 만주와 연해주에 거주하던 조선족(대진 유민)과 퉁구스 만주족을 통틀어 여진女眞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금사金史』를 보면, 그 서두에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가족이다. 다 같이 물길의 7부족에서 나왔다[女眞, 渤海本同一家. 蓋其初皆勿吉之七部也.]”라는 금나라 건국자[金太祖] 아골타阿骨打의 말이 실려 있습니다. 고조선·부여·고구려의 후손인 발해 사람과 여진 모두 뿌리가 같은 동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