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르네상스'에 해당되는 글 3건

  1. 서구 근대를 연 흑사병④
  2. '종교는 없다'를 읽고③ 2
  3. 일제의 민족종교 말살책과 독립운동

서구 근대를 연 흑사병④

생존의 비밀

서구 근대의 문을 연 흑사병

 

유럽의 중세는 암흑기였다.

14세기에 창궐한 흑사병은 5세기 중반 아테네에서 벌어진 상황과 기이할 정도로 유사하게 인간 사회를 해체시킨 강력한 전염병이었다.

 

흑사병Black Death은 서양의 중세를 무너뜨렸다.

페스트라 불리는 흑사병은 ‘역사상 최악의 연쇄 살인마’ 라고 일컬을 정도로 이미 인류에게 자연 재앙의 공포를 상기시키는 문화적 상징이 되어 있다.

현재 의학계에서는 이 흑사병을 앞으로 일어날 병란 상황의 모델로 놓고 연구하고 있다고 한다.

‘흑사병’은 몸이 새카맣게 되면서 죽는 병이라는 뜻이다.

쥐벼룩으로 감염이 되는데, 이 병에 걸리면 불에 데었을 때 나타나는 수포처럼 생긴 종기가 몸의 구석구석에 생겨나면서 고열과 발작이 일어난다.

종기가 작은 사과나 달걀만 하게 커지면 극심한 고통과 함께 피를 토하고, 사나흘째 되면 온몸이 곪아서 죽게 된다.

본래 흑사병은 중국 운남성의 풍토병이었다고 한다.

13세기 중반, 몽골제국의 황제 뭉케(1208〜1259)가 남송제국을 공격하기에 앞서 교두보 확보를 위해 운남 지방을 정벌하였는데, 이때 흑사병균이 몽골 군사에게 전염된 것으로 본다.

이것이 1300년대에 전 세계에 불어 닥친 급격한 기후 환경 변화 때문에 창궐하게 되었다.

몽골 군대와 함께 북쪽으로 올라간 흑사병은 1331년에 북경에서 대발을 하였고, 북경 인구의 3분의 2가 이 전염병으로 사망하였다.

이후 흑사병은 유라시아 실크로드를 타고 유럽으로 퍼져 갔다.

1346년, 흑사병은 현재의 흑해 연안 크림 반도의 항구 도시인 카파Kaffa에 도착하였다.

당시 이 도시는 3년 동안 킵차크한국(몽골제국에 속한 나라)의 통치자인 야니벡에게 포위 되어 있었다.

그 안에는 제노바의 상인들도 갇혀 있었다.

 

흑사병은 먼저 도시를 포위하고 있던 몽골군을 습격하였다.

몽골의 병사들이 죽어 넘어가자 야니벡은 살아남은 군사들과 철수하면서, 투석기를 사용하여 감염된 시체를 카파의 성벽 안으로 던져 넣었다.

성 안의 사람들이 시체를 성벽 너머 바다로 다시 던져 버렸지만, 페스트는 이미 도시 안에 퍼진 상태였다.

 

1347년, 몽골군이 철수한 뒤 자유를 찾은 제노바 상인들은 성에서 나와 배를 몰고 이탈리아로 향했다.

그들과 함께 흑사병도 지중해의 다른 항구로 빠르게 번져 나갔고, 1350년에는 전 유럽에 전염이 되었다.

폐 페스트나 패혈성 페스트에 걸린 사람들은 아침에 멀쩡하다가도 밤이 되기 전에 피를 토하며 죽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 병을 ‘떼죽음big death’ 이라 불렀다.

흑사병은 1347년부터 1351년 사이의 짧은 기간 동안 맹렬한 위세를 떨쳤다.

최소한 유럽 인구의 3분의 1, 전 세계에서 7천5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탈리아 시에나의 한 생존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아버지는 자식을 버리고, 남편은 아내를, 형은 동생을 … 아무도 돈이나 우정으로 죽은 이를 매장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주야로 수백 명씩 죽어갔고 모두가 구덩이에 버려져 흙으로 덮였다. 구덩이가 메워 지자마자 더 많은 구덩이를 팠다. 나, 투라의 아놀로는 이 손으로 내 다섯 아이들을 묻었다.」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는 최소 3분의 1인 2,500만 명이 죽고 아프리카, 아시아 일부에서도 인구의 4분의 1 내지 절반이 죽었다.

중국은 흑사병으로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죽었다.

이는 당시 중국을 지배하던 몽골의 힘을 약화시켜 몽골제국의 해체를 가속화시키는 한 계기가 되었다.(존 켈리 지음, 이종인 옮김 ,「혹사병시대의 재구성』, 도서출판 소소, 2006, 재인용.)

 

교회도 흑사병을 피할 수는 없었다.

어떤 교구에서는 성직자의 70〜80퍼센트가 이 병으로 죽었다.

교황의 탄식 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교회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너무도 많은 사람이 허망하게 죽자 사람들은 교회나 봉건 제후 대신 페스트에 비교적 신속히 대처한 도시 정부를 더 믿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공용어였던 라틴어 대신 각국의 세속 언어가 공식 문서에 쓰이기 시작하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의 의식과 태도의 변화였다.

흑사병은 인간으로 하여금 중세의 기독교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의 본질에 눈뜨게 하였다.

그리하여 화가들은 천상에 대한 그림보다는 고뇌하고 고통에 찬 인간의 모습을 즐겨 그렸다.

이로써 르네상스의 밑거름이 마련되고, 종교개혁이 일어나는 등 바야흐로 문명의 대전환이 시작되었다.

 

또한 수많은 농노의 죽음으로 노동력이 부족하게 되자 임금이 상승하였다.

농노들은 귀족의 부와 권력을 잠식하여 차츰 소작인, 소지주(자작농) 또는 장인으로 독립하였다.

흑사병은 엄격했던 사회 계층 구조를 흔들어 유럽의 중세 봉건 사회를 무너뜨리고 근대 자본주의를 발흥 시키는 요인 가운데 하나로 작용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흑사병은 1천 년 동안 지속되었던 유럽의 중세를 막 내리고 근세로 이행하도록 ‘인류 역사의 행로’를 바꾸어 버렸다.

그런데 여기서 꼭 강조하고 싶은 의학사의 사실이 하나 있다.

 

흑사병이 유럽을 한창 휩쓸던 때에, 환자를 간호하던 일부 단체의 수도사들은 감염이 되었어도 쉽게 회복되었고, 한 번 앓고 나면 면역력이 생겨서 다시는 걸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수도修道가 병을 이겨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역사상 가장 가혹했던 14세기 중엽 유럽의 흑사병은 유럽 인구의 3분의 1에서 절반까지 죽음에 이르게 했다.

 

전염병을 연구하는 전문 역학자疫學者들은 인류가 전염병의 주기에 들어섰다고 경고하고 있다.

이들이 진단하는 것처럼 현대판 흑사병이 도래한다면 인류는 과연 살아남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생존의 비밀』<4>

'종교는 없다'를 읽고③

진실의 역사

'종교는 없다'를 읽고


예수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14:16)라고 했다.

이는 진리가 깨어진 나(법신)를 이야기 하는 것이지, 예수란 색신(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가 깨어진 자아인 것이다. 진리가 깨어진 모든 성인은 같은 선언을 하였다.

 

우리자신이 기존관념의 노예가 되어 있지는 않은가 살펴봐야 할 것이다.

이제 예수 정신, 석가 정신에 따라 돌아가야 할 때다.

우리는 모든 종교, 모든 교리를 떠나 진정한 자유를 성취할 수 있으며 예수와 석가가 추구했던 참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주체적 인간, 참사람은 종교나 교리, 사상, 제도 등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어버리고 진정한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근본으로 돌아가는데는 많은 고통과 시련이 따른다.

인간의 관념이 거듭나는 과정은 천지개벽보다도 더 어렵다.

중세의 카톨릭은 지상의 모든 권한을 쥔 강력한 집단이었다.

중세의 어둠을 벗긴 것은 종교적 신본주의가 아니라 인본주의에 눈 뜬 르네상스였다.

중세 카톨릭 중심의 체제가 무너지면서 종교개혁이 일어난다.

그후 역사상 가장 잔인한 종교전쟁이 구교와 신교사이에 벌어진다.

아마도 21세기를 맞이하면서도 고착적인 인간 관념은 전쟁을 통해서만 부서질지도 모를 일이다.

토인비는 21세기를 역사가가 서술할 때 동서 종교의 만남과 이해라고 기록할 것이라고 하였다.

인간과 우주의 궁극적 실재를 신이라 한다.

그 신에 대한 경외심은 기독교인들에게만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가진 자나 ‘잘 믿는다’고 자랑하는 사람, 각종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예수의 파격적 발언은 결국 기존 체제로부터 미움을 샀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예수는 유대교 지도자인 대제사장들에게도 경고를 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오히려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21:31)

 

교권을 절대시하던 중세 카톨릭에 반대하여 일어난 프로테스탄트가 어처구니없게도 교권대신에 성경의 문자주의에 매달리고 자기와 다른 해석을 하는 이들을 ‘이단’으로 몰면서 수천 교파로 갈라진 것은 아이러니다.

예수가 그토록 원했던 하나님의 나라는 기독교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제 기독교는 우월주의와 배타주의에서 벗어나야한다.

하나님 나라는 종교간의 장벽, 인종간의 장벽, 국가 혹은 문화적 장벽을 초월하여 실현될 수 있는 열린 세계이다.

종교는 이 시대가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알아야한다.

종교의 목표가 인류구원과 세계평화와 사랑에 있다면 그것을 이루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들을 제거하는 근본적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교파 이기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종교인들은 철저히 자기를 비우고 교단과 교리의 벽을 넘어서야 한다.

그럴 때만이 하나님을 자기 안에 모실 수 있고, 예수가 소망했던 행복과 평화의 세계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는 없다' 책에서》

일제의 민족종교 말살책과 독립운동

진실의 역사

일제의 민족종교 말살책과 독립운동

 

한민족은 지난 1세기 남짓 동안 엄청난 역사의 횡포에 시달려 왔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경쟁적 횡포에 농락당하고, 이어서 나라를 빼앗기고 일제의 식민지 통치하에 들어가는 역사적 치욕을 당했다.

식민통치에서 해방은 되었지만 곧 민족은 분단으로 귀착되는 비극을 맞이한다.

그리고 6.25라는 민족상쟁의 아픔을 겪게 된다.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통일을 맞이하게 되겠지만 불행하게도 그 통일은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를 포함한 국제 세력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진행되고 있다.

따라서 일제의 강점기에 조작된 식민사학과 해방이후에 우리문화와 역사를 배타적 시각으로 바라본 외래종교의 사대적 시각을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통일이 진행되면 우리의 민족은 극도의 사회혼란과 분열만을 조장할 것이다.

 

열강들의 잇권노름으로 시작된 일제의 한반도 강점은 그만큼 우리민족의 현재와 미래를 돌이킬 수 없는 불행으로 몰아넣은 대사건이었다.

이러한 국권 상실의 운명 앞에 민족종교는 후천개벽사상을 주창하며 미래의 희망과 확신을 표출한다.

이는 역사의 횡포에 민족의 희망과 열망으로 분연히 일어난 민족종교의 핵심 사상이었다.

그 효시가 1860년 최제우가 일으킨 동학이었다.

보국안민의 기치아래 민족종교는 당연히 격렬한 항일운동의 정신적 주체가 되었다.

갑오동학혁명, 3.1운동, 그리고 만주에서의 항일독립운동 등과 같이 한국 근대사의 주요한 사건들은 모두 후천개벽사상과 보국안민의 사상적 기치아래 전개되었던 운동이었다. 이처럼 민족종교는 민족주체의식의 사회적 실체였다.

 

그러므로 조선 총독부는 민족종교를 민족정기의 온상이며 항일정신의 핵심으로 간주하고 탄압을 가했다.

오직 순수한 민족애와 민족 정체감만이 천도교, 불교, 기독교 같은 특정종교의 세계관에 구애되지 아니하고 한민족을 하나로 묶을 수가 있었다. 가령 유교,불교와 같이 오래된 외래종교라 해도 그 사상이 우리민족 정체성의 핵심을 반영하지 못하고, 우리나라에서 역사가 일천한 기독교는 아직 민족문화 전통의 정서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였다.

민족종교는 망국의 한에 빠져있는 국민에게 커다란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으며, 민족의 통합에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이러한 사실을 간파한 일제는 민족종교의 탄압을 가속화 했다.

 

민족종교가 일제치하에서 독립과 민족정신의 회복을 기도했다면 일제는 민족종교를 말살했다.

양자는 첨예한 대립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정책적 의도에 의하여 설정된 개념의 범주 안에서 아직도 우리사회가 민족종교를 이해하고 있다면, 아직도 일제의 식민지배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충격적 사실을 입증하는 것일 뿐이다.

한국 민족종교를 신흥종교, 유사종교 또는 사이비종교, 심지어는 사교라는 용어로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이 오늘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관행이다.

이러한 개념들이 사용되기 시작한 역사적 시대가 바로 일제시기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서양으로부터 시작된 제국주의 정책은 타문화에 대해 일방적 통행을 강요했다.

우리의 전통가치는 근대화라는 명목하에 멸시되었고 파괴되었다.

역설적이지만 서양사상과 종교가 합리적이라는 근거는 더 더욱 없었다.

과학발전은 오히려 서양종교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가고 있었다.

그동안 역사적으로 본다면 깨어난 과학자들이 하나님의 신권에 도전한다는 명목하에 탄압을 받았던 사실을 알아야 한다.

서구를 깨운 것은 중세의 신권사회에서 부터의 이탈인 르네상스였다.

오히려 서구의 근대화란 탈신권주의의 각성으로부터 출발한 것이었다.

근대화란 서양화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동안 발전의 모델인 서양을 모방하다 보니까 서양의 종교는 합리적이고 다른 종교는 비합리적인 태도로 대응을 해왔다.

일제는 우리문화는 온통 미신으로 매도해 놓고 자신들은 아직도 수많은 신을 모시는 신도(신사)문화를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일제의 위장된 문화정책은 큰 효력을 발휘하였다.

민족종교에 대한 이런 냉소적 태도는 불과 반세기 전 일제하에서 우리민족이 겼었던 수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데서 비롯되었다.

더군다나 일제하에서 민족종교가 어떤 역사적 사명을 감당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데서 기인한다.

 

그만큼 우리사회가 우리역사를 왜곡한 것만큼이나 민족의 정신의 산물인 민족종교 역시 철저히 곡해되어 왔던 것이다.

민족종교에 대한 잘못된 일차적 이해는 일제의 식민지 문화정책에서 비롯된다.

일본총독부는 처음부터, 천도교, 대종교, 증산교(보천교) 등 사회적으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한국민족종교들을 종교로 인정하지 않았다 .

다만 이들을 종교와 유사한 단체라는 뜻에서 유사종교, 또는 사이비종교로 규정했다.

이처럼 민족종교는 처음부터 존재를 거부당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일제는 정략적으로 민족종교를 거세시켰던 것이다.

일제시대에 공인된 종교는 일본의 신도, 불교, 기독교만이 공인되고 그 외의 종교는 종교로 인정을 하지 않았다.

이는 식민지정책을 수행하는데 매우 효과적이고 편리했다.

민족종교는 경계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한국의 민족종교는 사회에서 제거해야할 단체로 취급되었다.

슬픈일이지만, 해방이 된지 오래건만 노예적 사관에 사로잡혀 일제가 만들어 놓은 이 개념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서구 열강과의 외교관계를 고려해서 오히려 장려를 하였다.

식민지국가에서 민족종교가 기댈 수 있었던 세력은 오직 한국 민중이었다.

그러나 식민지의 민중역시 총독부의 수탈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민족종교는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무자비한 탄압정책에 희생되어 만신창의가 되었다.

그러나 해방이후에도 우리나라는 친일파들이 실권을 쥐면서 오히려 민족사학자와 독립운동가들을 빨갱이로 몰아서 숙청을 했다.

국권을 잃은 민족에겐 힘없는 국가의 민족정신을 철저히 짓밟히는 고통이 뒤따라야 했다.

식민지 조선의 사상과 가치 종교,역사 모두 철저히 멸시되었다. 국가와 민종종교는 외세 앞에 철저히 유린당했다.

 

일제의 식민정책에 의해서 철저히 유린당하고 희생된 한국 민족종교의 비극적인 역사를 우리는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는가.

피해자가 무능하다고 봐야할 것인가.

아니면 약육강식의 논리대로 가해자는 신이 자신의 편을 들어주었다고 승리의 찬가를 불러야 하는가. 가

치관이 결여되고 도덕적으로 무감각한 지금의 일본의 아베정권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는가.

건강한 가치관에 의해서 일관되고 통일된 도덕적 태도만이 과거의 잘못을 진심으로 사과할 줄 아는 용기를 갖게 한다.

과거 역사의 올바른 교정은 자기를 반성하는 용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 국민은 용기 없는 가해자를 만난 불행한 처지에 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상대방을 의도적으로 위해하는 악의적인 가해자를 역사에서 다시 나타나지 않도록 공동으로 노력을 해야 한다.

인간지성은 인간사회에서 단순피해자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명령한다.

인간의 양심은 정의를 지향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 신은 정의의 편이기 때문이다.

강자가 되는 것이 하늘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성자들의 가르침에서도 마찬가지로 지적하고 있다.

유대율법과 로마강권에 항거한 해방자로서의 예수의 삶, 부귀를 버리고 불성을 회복하라는 부처의 삶, 인의를 바탕으로 한 대인군자의 삶을 살으라고 했던 공자도 역시 패권놀음에서 벗어나 본질을 지향해라 했다.

그러나 그 사상을 믿는 사람들은 성자들의 가르침을 잃어버리고 패권놀음의 하수인이 되어 버린 안타까운 현실이다.

지나온 일류역사를 돌이켜 보건데 종교역사도 제국주의 패권역사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강대국의 종교패권을 약소국에 행사하여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지배하려 했던 것이다

올바른 인간, 참된 가치관 등 그동안 인류가 지향해온 숭고한 가치가 일반적 상식이 되는 사회가 되려면 사회 구성원들의 양심과 성숙된 인격이 필수 조건이다.

『일제의 한국 민족종교 말살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