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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택시운전사와 5.18 광주민중항쟁

택시운전사와 5.18 광주민중항쟁

진실의 역사

택시운전사 영화와 5.18 광주민중항쟁

폭압적인 5.17군부쿠데타 단행과 대대적 검거 선풍이 몰아치자 대부분이 민주세력은 저항력을 완전히 상실한다. 그러나 단 한곳에서 예외적 상황이 벌어졌다. 5.18광주 민중항쟁이다. 이 사건은 전남대 정문앞에서 발생했다. 광주일원의 대학은 완전히 공수부대에 장악된 상태였다.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7공수여단이었다. 운명의 18일 멋모르고 대학에 남아 있었거나, 혹은 공부를 하기위해서 등교하던 전남대 학생들이 공수부대원에 걸려들어 피투성이가 되도록 얻어 터졌다.

 

비극은 시작되었다. 사태는 순식간에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다. 비상계엄해제와, 공수부대철수를 강력히 외친것이다. 총칼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은 이들 세력이 존재함은 전두환 일파에게는 위협적인 요소였다. 조기에 진압을 하지 못하면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갈 것이고, 오히려 군부가 민중의 심판대 위에 자신들의 목을 내놓아야 하는 처지가 되는 것이었다.

초조해진 전두환 일파는 군부 특유의 단순함으로 이 문제를 해결한다. 공수부대의 최초의 희생자는 장애자였다. 공포감을 조성하려던 전두환 일파는 민중의 원한이 응집됐을 때 분노를 넘어 두려움조차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억압은 시민들을 거듭 투쟁으로 내몰고 있었다.

 

20일 6시경 택시기사들이 중심이 되어 200여대의 차량을 몰고 도청을 향해 진격했다. 그뒤로 거대한 민중의 행렬이 이루어졌다. 한마디로 민중의 위대한 힘이 연출되는 장엄한 순간이었다. 다급해진 공수부대는 미친 듯이 차량을 향해 덤벼들었다. 일단 불붙은 시민투쟁의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그들은 광주 시민들이 이토록 엄청난 투쟁력을 발휘할지는 전혀 몰랐다.

20일 밤 시민들의 파상공세에 밀린 공수부대들은 발포로 응수하며 사상자가 늘어난다. 이에 광주시민들은 무장투쟁을 다짐한다. 무장 투쟁에 자신감을 갖게 되고 광주시민이 승리할 경우 그들은 민중의 심판대에서 목을 내놓아야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던 전두환 일파는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하며 군 병력 2만명을 즉각 투입한다. 5월21일 오후 1시 공수부대의 폭압과 만행, 살인과 무력 앞에 광주시민들은 무장투쟁으로 대응을 한다. 그러나 군부의 총탄에 젊은이들이 쓰러져갔다. 결국 무력진압은 광주시민을 무장투쟁으로 내몰았다. 그들은 파출소 무기고를 깨뜨리고 무기를 확보한다. 시민군은 21일3시쯤 광주시민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으며 출현하지만 전두환 일파에게는 경악스런 일이었고 시민들이 무장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시민군이 도청탈환 시간부터 전남각지로 항쟁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군부는 광주를 완전 봉쇄한다. 우선 통신 .교통의 두절은 생활필수품 부족문제로 닥쳐왔다. 전남일원으로 통하는 국도는 완전히 계엄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광주시민들은 이러한 악조건에 지혜롭게 대처했다. 이로부터 광주시민이 오늘날까지도 높은 긍지를 가지고 있는 공동체적 상호 협력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광주시민은 매점매석을 방지함으로써 제한된 필수품을 최대한 활용한다. 쌀집에서는 한꺼번에 두되 이상의 쌀을 팔지 낳았고 담배도 한 갑씩만 팔았다. 모든 슈퍼와 식료품점도 강요된적 없이 자발적으로 질서를 만들어 나갔다. 이 기간 동안은 평소에 있던 강도나 절도도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로써 광주시민들은 인간이 투쟁을 통해 얼마나 질서정연하고 고결해질 수 있는지를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그러나 텔레비전과 언론은 광주시민의 참상은 전혀 내보내지 않았고 시위대를 폭도로 오도했다. 광주는 고립작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대규모 진압작전이 착착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이 이 학살의 공범자임이 확실히 드러나게 된다.

한국군의 작전 통제권은 미국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어 있었다.1980년 군부의 권력 찬탈음모는 명백히 미국의 작전권 통제 아래 있는 군대의 힘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광주민중항쟁진압에 2만 병력 투입승인은 명백히 미군이었다. 미국의 이익을 위해 친미세력인 전두환을 두둔한 것이었다. 이는 전두환 일파에 대한 미국의 확고한 지지표명이었으며 한국민중에 대한 무력탄압이었다.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미국과 군부독재의 행동은 자신의 권력유지를 위해서라면 대량학살도 서슴치 않는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폭로한 사건이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민주주의의 수호자, 경제성장의 주역 등, 그 동안 미국과 군부독재의 두 얼굴의 가면이 벗겨지는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광주민중항쟁은 우리민중 속에 세찬 반미 반독재 투쟁의 돌풍을 불러일으키는 진원지가 되었던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광주민중항쟁을 통해 억압의 질서가 붕괴되고, 해방의 질서가 열린 것이다. 광주민중항쟁은 허위와 기만에 가린 역사의 장막을 과감하게 걷어냈다.

전두환 일파는 광주 금남로의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권력을 향한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광주만중항쟁 3일후 5월31일 정부업무를 총괄하는 국보위를 출범한다. 그리고 광주학살의 죄악상을 은폐하며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이란 대사기극을 연출한다. 광주는 두 번 죽었다. 망월동의 흙이 마르기도 전에, 광주를 정치적으로 확인 사살하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광주시민들은 폭도란 누명을 쓰고 살아야 했다.

 

그리고 1천여 명의 핵생과 수백명의 교수들을 한꺼번에 제적, 해직시켰다. 그리고 비판적 언론인 700명을 해직시켰다.그리고 8월4일 국보위는 사회악 일소를 위한 특별조치에 따라 폭력배 소탕작전을 대대적 실시한다. 이로 인해 불과 10일 만에 3만 여명이 넘은 사람이 잡혀 들어갔다. 이중에는 상당수의 민주 인사들이 포함 되었다. 이들 중 2만 여명은 삼청교육대에 수용된다. 이는 철저히 백성을 군부독재형으로 다스리겠다는 신호탄이었다. 바로 이즈음 미국은 선거라는 절차를 거치기만 하면 한국의 새로운 지도자를 확고하게 지지하겠다고 나섰다. 이제 전두환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

 

8월13일 김영삼에게 정계은퇴성명을 발표하게 하고 최규하 대통력은 강제 하야 시켰다.
곧이어 8월19일 “임기 7년, 단임,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를 요체로 하는 새 헌법안을 확정지었다.

그로부터 3일 뒤인 8월22일 가장 높은 ‘태극무공훈장’을 가슴에 단 전두환은 전역식을 거행했다. 이는 자신의 손으로 별 네개를 단지 불과 보름만의 일이었다. 계속해서 닷새후인 8월27일, 통일주체 국민회의 선거를 통해 제11대 대통령이 된다. 전두환은 대통령에 단독출마해서 2,525명의 투표자 가운데 무효 1표를 제외한 2.524표를 얻어 100%득표율을 기록했다. 드디어 피묻은 권좌위에 학살자가 올라앉은 것이다. 전두환은 다음해 1871년 2월 신헌법에 의해 전두환을 재차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민정당이라는 집권여당과 민한당이라는 관제 야당을 날조하여 독재 정치의 길을 열어 나갔다. 제 5공화국이 막이 오른 것이다.

 

한편 전두환의 열렬한 후원자인 미국은, 전두환이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오르자 즉각 환영하고 나섰다. 존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은 전두환이 대통령에 오를 혈통을 지녔다고 공공연히 주장했다. 그리고 “한국민은 들쥐와 같은 민족이라서 누가 지도자가 되든 복종할 것이며, 한국민에게는 민주주의가 적합하지 않다”고 하였다(로스앤젤리스 타임즈 1980.8.8.). 그리고 AP통신과의 회견에서 위컴은 “한국의 10월 사태(박정희 암살사건-사실 이 사건도 박정희정권이 흔들리자 토사구팽을 한 것이라고 고 김재규가 증언한 바 있다. ‘자신의 뒤에 미국이 있다’ 라고 했다.미국이 친미정권을 세우고 민중이 그 실체를 알아가면서 대규모 민중시위가 일어나면 꼬리를 자른 것이다).

 

☞참고 : 1972년에 시작된 유신체제는 선진국이나 미국에서는 사향산업 중화학공업에 대한 무리한 투자로 경제의 악화를 가져왔고, 1인 장기집권에 대한 강압통치와 미국 카터 행정부와의 불화 등 정치·경제적 모순이 반정부 시위로 폭발하여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 해 10월 16일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18일 부산에 비상계엄령이, 20일 경남 마산·창원에 위수령이 발동되었다. 더욱이 집권층 내부의 갈등이 부마사건의 처리문제로 더욱 커지게 되었다.

이후 “미국의 한국정책에서 가장 성공한 일중의 하나는 전두환 정권이 수립된 것이다. 우리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으며, 우리의 보람도 크다”며 자신을 생각을 솔직히 표현 하였다.이러한 미국의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전두환은 앞선 독재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다음해 3월 미국을 직접 알현하였다. 당시 꼭두각시 언론들은 전두환의 방미 일정을 ‘영광의 장정’이라 부드려 호들갑을 떨었다. 미국과 전두환 정권은 이미 광주 민중항쟁을 통해 충격적인 사실에 직면한 상태였다. 그들은 총칼에도 죽음을 각오하고 항거했다. 전두환 정권은 밀리면 끝장이라는 강박관념을 가지게 되었다. 이로써 군부세력은 민주화 투쟁에 대해 과민하리라 만치 완강하게 저항하게 되었다. 결국 민중에 대해 생사를 건 싸움을 하도록 내몬 것이다.

 

독재정권은 저항세력은 언론조작을 통해 은폐 또는 왜곡되고 폭력,난동으로 매도하였다. 이당시 미국과 소련은 강경노선으로 인해 군사적 긴장이 극도로 고조 되었던 시기이다. 레이건 정권은 미국의 이익을 위협하는 모든 악의 근원은 소련에 있다고 간주하였다. 결국 소련을 제거하는 것이 미국의 궁극적 목표가 된 것이다.레이건 정권은 군비증강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동맹국들과 핵전쟁연습을 실시한다. 이에 소련은 선택의 여지가 없이 군비증강에 나서야 했다. 결국 소련은 막대한 군비지출로 인해 소련경제의 3분의1을 쏟아 붓고 견딜 수 없는 소련은 미국의 계획대로 중반부처 경제 위기의 징후가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한다.이는 소련붕괴의 원인이되었다. 우리나라 역시 군사대결이 한반도에서 강하게 나타날수록 우리영토와 민족이 강대국의 전쟁터로 전락하여 전쟁의 제물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전두환 정권은 군사적 긴장과 대결정책을 배경으로 사상 유례없는 폭압정치를 구사하였다. 그런데 역사적 경험이 말해 주듯이 극단적인 독재정권일수록 극단적인 부패를 낳기 마련이다. 이는 민중의 지지에 기초하지 못한 어떤 집단이든, 권력은 권력유지를 위해 보다 많은 자금을 필요로 하고, 결국 자금 확보를 위해 권력형 부정축재를 통해 조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전두환 정권시절 물가가 안정된 이유는 3저 현상의 혜택이었다. 저달러, 저유가, 저금리 구조는 한국경제에 커다란 호황을 구가하게 되었다. 저달러는 수출단가를 올렸다. 이에는 일본의 대폭적 가격인상덕분이 상대적 이익으로 작용했다. 한마디로 수익률을 최대한 올릴 수 있었다. 또한 국제 저금리의 하락은 차관에 대한 이자부담을 줄여 주었고, 그만큼 국내 기업의 수익은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저유가는 국제 원자재 가격의 하락으로 국내물가 안정을 유발시켰다.중요한 것은 이런 이익이 나면서 기업은 흥청망청하였지만 노동자들의 삶은 개선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3저 호황이 일어나자 즉각 미국은 수입개방 압력을 가한다. 그리고 우리는 대개 수용된다. 농산물 개방으로 농촌은 하루 아침에 파괴 되어갔다. 전두환 정권은 5.16쿠데타 당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대탄압을 가했다.

일제 치하이후 악법도 법이라며 강자에 순종하는 것을 미덕으로 강요받았던 한민족은 일제의 탄압에도 독립운동으로 폭발했고, 정부수립 이후에도 끊임없이 친일 친미 주구세력에 의해 억압받아 왔으나 우리 스스로 정의와 가치를 위해 한계를 극복하는 민중의 힘을 보여 주었다.

당시 시위 주동은 당연히 구속 대상이었다. 그만큼 시위를 주동하겠다고 마음먹는 것은, 제적은 물론이고 구속될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제적과 구속을 각오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자신에게 모든 것을 걸고 있던 가족에게 커다란 시련을 안겨다 준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이 택한 길을 자랑스러워했다. 이런 이들의 결단과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에게 자유와 행복은 억압당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를 경제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나라로 평가하곤 한다.

이 역사를 사실은 민중이 만들어 왔던 것이다.

역사연구에서 꼭 살펴봐야 할 것은 지배층으로서의 역사와, 민중의 역사를 동시에 살펴보는 것이다.

그럴 때 권력에 의해 가려진 위대한 민중들의 숨결을 보게 된다.

근대화의 출발점, 권력층의 기득권 유지와 부패와 탄압에 대한 항거, 그 시작은 동학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일제의 독립운동사로 이어지고, 오늘날 스스로 우리 역사를 만들려는 민주화 운동, 즉 민중들의 몸부림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동학에 대한 이해 없이는 역동적인 한민족 근대화 과정을 결코 읽어낼 수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