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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역사를 바꾼 북방민족②-흉노족

역사를 바꾼 북방민족②-흉노족

진실의 역사

역사를 바꾼 북방민족

 

STEP2. 환단고기가 밝혀주는 북방민족의 기원


1. 유럽을 뒤흔든 흉노족
흉노의 기원
흉노족은 선우를 ‘탱리고도撑犂孤塗 선우’라고도 불렀는데, 탱리撑犂는 ‘하늘’을 뜻하는 흉노어 ‘텡그리tengri’의 음역이고, ‘고도孤塗’는 아들을 의미합니다. 곧 탱리고도는 하늘의 아들, 즉 천자天子를 의미합니다. 동이족의 천자사상과 일치합니다.

 

흉노는 천지와 일월을 숭배하고, 나아가 조상을 숭배하며, 일 년에 세 번 큰 제사를 지냈습니다. 선우는 매일 해와 달에게 절하고 자신이 거처하는 게르(천막집)의 문도 항상 동쪽을 향해 배치하였습니다. 이처럼 문을 동향으로 한 것은 동쪽을 중시하는 동이족의 관습과 일치합니다. 세계사에서 수수께끼로 남아있었던 흉노의 기원에 대해서 유일무이하게 밝혀주는 사서가 바로 『환단고기』입니다.

 

甲辰六年(갑진육년)이라 命列陽褥薩索靖(명열양욕살삭정)하사 遷于弱水(천우약수)하시고 終身棘置(종신극치)러시니 後(후)에 赦之(사지)하사 仍封其地(잉봉기지)하시니 是爲凶奴之祖(시위흉노지조)라.
역주 재위 6년 갑진(단기 157, BCE 2177)년, 임금께서 열양列陽 욕살 삭정索靖을 약수弱水 지방에 유배시켜 종신토록 감옥에 가두셨다. 후에 용서하여 그 땅에 봉하시니, 흉노凶奴의 시조가 되었다.(「단군세기」 3세 오사구 단군)

丙辰五年(병진오년)이라 凶奴(흉노)가 入貢(입공)하니라.
역주 재위 5년 병진(단기 1429, BCE 905)년, 흉노匈奴가 공물을 바쳤다. (「단군세기」30세 내휴단군)

戊寅(무인)에 匈奴(흉노)가 遣使番韓(견사번한)하야 求見天王(구현천왕)하고 稱臣貢物而去(칭신공물이거)하니라.
역주 무인(단기 1691, BCE 643)년 흉노가 번한에(52세 엄루왕 때) 사신을 보내어 천왕을 뵙기를 구하고, 스스로 신하라 칭하고 공물을 바치고 돌아갔다. (『태백일사』「삼한관경본기」)

      

 

흉노의 좌우현왕 제도
묵특선우는 흉노 제국을 신교 삼신문화의 고향인 고조선과 같이 셋으로 나누어다스렸습니다. 즉 자신은 중앙을 통치하고 동쪽은 좌현왕이, 서쪽은 우현왕이 통치하게 했던 것입니다. 좌현왕은 우현왕보다 우대되었는데 보통 선우의 아들을 좌현왕으로 삼았습니다. 좌현왕을 좌도기왕左屠耆王이라고도 하였는데, 항상 선우의 태자를 좌현왕으로 임명하였고, 선우의 유고有故 시 그 자리를 계승하였습니다. 흉노의 좌우현왕 제도는 사마천의 『사기』 「흉노열전」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사기』 「흉노열전」에는 “좌우현왕, 좌우곡리왕, 좌우대장, 좌우대도위, 좌우대당호, 좌우골도후를 두었다. 흉노에서는 ‘현賢’을 일러 ‘도기屠耆’라 하기 때문에 항상 태자를 좌도기왕으로 삼았다[置左右賢王, 左右谷蠡王,左右大將, 左右大都尉, 左右大當戶, 左右骨都侯. 匈奴謂賢曰‘屠耆’, 故常以太子爲左屠耆王.]”라고 하였습니다.

 
역사를 바꾼 흉노족
흉노는 그 수가 계속 늘어나 진나라 때 와서는 이미 오르도스와 몽골고원, 천산산맥 일대를 주름잡고 있었습니다. 한나라 초기 묵특선우冒頓單于(BCE 209~BCE 174) 때 서쪽의 월지와 동쪽의 동호東胡(번조선)를 격파하고 아시아 최초로 유목 대제국을 세웠습니다. 그후 내분으로 남·북흉노로 분열하게 됩니다. 이 중 북흉노는 사라진 듯 했지만 4세기 중반에 갑자기 ‘훈Hun’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의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훈족은 370년경 흑해 북부에 나타남으로써 처음으로 유럽에 그 존재를 알렸습니다. 이들은 볼가 강을 건너 남러시아 초원지대에 거주하던 알란족을 공격했고, 이어 알란족과 함께 동고트족과 서고트족을 공격하여 유럽 대륙에 민족이동의 대물결을 야기하였습니다. 공포에 질려 도주한 게르만족이 밀물처럼 로마 국경 안으로 몰려들자 이를 제어하지 못한 서로마 제국은 결국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신라 김씨의 시조는 흉노의 태자
훈족의 이동으로 서쪽에서 새 역사의 물결이 일고 있었을 때 흉노의 또 다른 이동이 동쪽에도 있었습니다. 때는 한 무제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한 무제가 흉노를 공략할 때 흉노 좌현왕의 아들이 자기 어머니와 함께 한나라의 포로가 된 것입니다. 왕자는 궁궐의 말을 돌보는 일을 맡았는데, 품위 있는 거동과 성실함이 한 무제의 눈에 띄어 무제의 측근이 되었습니다. 이 흉노 왕자의 이름이 김일제金日磾입니다.

 

뒤에 무제는 망하라莽何羅의 반란을 막은 공을 치하하여 그를 ‘투후秺侯’로 봉하였습니다. 투후는 ‘오르도스의 제후’라는 뜻입니다. 김일제의 후손인 성星은 문무왕의 비문에 나오는 15대조 성한왕星漢王으로 추정합니다. 혹자는 성한왕을 경주에 들어온 김알지金閼智로 비정합니다. 김일제의 후손 중에서 왕후(전한 11세 원제元帝의 비 효원왕후)도 배출되었습니다.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新을 건국한 왕망王莽은 김일제의 현손玄孫이라 합니다. 외척인 김일제 가문은 왕망이 정권을 잡으면서 최고의 권세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왕망이 몰락하자 위험한 처지에 몰렸습니다. 정확한 경로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 후에 이들은 한반도로 망명한 것으로 보입니다. 문무왕비 비문과 중국 서안西安에서 발견된 당나라 시대의 묘비명에 김일제가 신라 김씨 왕가의 조상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볼 때, 1세기 초 한나라에서 망명한 김일제의 후손이 신라와 가야에 들어와서 왕권을 잡은 것으로 추정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