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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와 독립운동사②

진실의 역사

환단고기와 독립운동사

1909년 대영절(3월 16일)에 이기, 나철 등이 단학회를 창립하고 그해 5월 5일에 강화도 참성단에서 천제를 올려 삼신상제님께 이를 고할 때, 계연수도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다. 두 달 후에 이기가 자진하자, 계연수가 그 뒤를 이어 단학회 2대 회장을 맡았다.

 

2년 후인 1911년(48세), 계연수는 스승이 생전에 세세히 감수해 준 『환단고기』에 범례凡例를 지어 붙인 후 드디어 세상에 내놓았다.

범례에 나와 있듯이, 묘향산 단굴암에서 책을 옮겨 편집한 후, 자신의 벗이자 독립운동 동지인 홍범도(1868~ 1943)와 오동진(1889~1944) 두 사람의 자금 지원으로 만주 관전현寬甸縣에서 『환단고기』 30부를 간행하였다.

다음은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일본군의 간도출병과 홍범도에 관한 기록이다. 홍범도의 호걸스런 기풍, 독립군 진영내의 분열상, 그의 전술전략, 한쪽 다리에 관통총상 등이 눈길을 끈다. 그는 청산리 전쟁 중에 총상을 입었던 것 같다.

다음은 홍범도에 대한 기록이다.
우리 민족사에서 홍범도 장군의 항일투쟁을 단순 명확하게 말해보면 가장 먼저, 가장 활발히, 가장 오래 투쟁을 한 우리민족의 영웅이다.
심하게 얘기해서 이순신 장군에 버금갈 정도의 위대한 인물이다. 홍범도 장군은 평양사람이고, 정식 군인으로 평양감영의 나팔수 출신이며, 따라서 정식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당시 나팔수는 오늘날 무전병과 같아 글을 모르고선 절대 맡을 수 없는 보직이다. 어느 책을 보니까, 홍범도 장군을 일자 무식꾼이라고 기술하고 있어 왜곡되게 쓴 책으로 돈벌이하는 사기꾼들이 많다는 것을 말해두고 싶다.

또한 홍범도 장군은 잠시 금강산 초계사에서 스님생활을 했다. 이때 이순신 장군의 적손인 스님으로부터 각종 진법 등을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후 비구스님과 사랑에 빠져 스님생활을 마감하고 함경도에서 두 아이의 아버지로서 포수생활을 하며 지내고 있었고 함경도 삼수갑산을 넘나들면서 명포수로 맹활약을 했다. 이때 험한 속의 날쌘 산짐승을 잡으려면 몇날 몇일을 사냥감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나타나면 협공해서 잡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래서 당시 포수들은 모두가 사격에 관해서 명사수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것도 움직이는 목표물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는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 봉오동 전투가 갖는 역사적 의의는 독립군과 왜놈들 정규군과 정면승부를 한 최초의 전투라는데 있다.

전과는 283중 46명을 사살했고 전멸 시킬 수 있었지만 갑작스런 소나기로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독안에 든 쥐를 놓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왜놈들에겐 하마터면 전멸이라는 치욕을 면하는 순간이었다. 얼마 후 치욕을 씻고자 혈안이 된 왜놈들이 홍범도 부대를 찾고자 헤매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김좌진 부대와 조우해 벌어진 전투가 청산리 전투다.

 

청산리 전투의 시작은 김좌진 부대가 했지만 전투과정에서 김좌진 부대는 왜놈들에게 밀려 쫓기는 위기에 빠졌지만 홍범도 장군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어 무사할 수 있었고 이때 홍범도 부대는 위기에 빠진 김좌진 부대를 도움은 물론 일본군의 협공을 역이용해 일본군끼리 총질을 하게 만들어 청산리 전투의 대미를 장식했다.

 

그러나 훗날 이범석 장군(당시20세)의 자서전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소설처럼 기술해 청산리 전투가 김좌진의 공 인양 만들어 청산리 전투의 진짜 승리자인 홍범도 장군(당시52세)을 역사의 뒤안길로 밀어내는데 일조를 했다.

일제때 배운 학자들로 이뤄진 해방 초기의 역사학계는 이러한 역사 왜곡에 면밀한 연구 없이 인용해 일본군들을 그토록 벌벌 떨게 한 민족의 영웅인 홍범도장군을 역사의 노숙자로 만들었다.

 

이와 같이 항일의병과 독립지사들은 한민족의 오염되지 않은 고유의 역사사서인 환단고기를 읽고 강독을 하며 대한독립과 아시아 평화를 위협한 제국주의에 강력히 항거한 것이었다.

역사관이 부족한 그들이었다면 과연 생사를 넘나드는 전장에서 혼을 바쳐 나라를 되찾으려 했겠는가.

그 당시도 일명 지식인이었던 많은 배운자들은 역사관이 부족한 시대조류에 편승해서 사대주의에 기대어 일본을 믿고 그들 편에 섰다.

바로 이 독립운동사를, 해방 후 친일세력이 득세를 하면서 거의 독립운동사를 가르치지 않거나 철저히 왜곡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독립운동을 했던 정신적 기반마저 신화로 치부되어 환단고기는 한낮 독립운동가들의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서 조작된 사서로 몰아 붙였다.

 

이리하여 그들의 원래 보급이 없던 독립군으로서는 교포의 큰 부락을 만나지 못하면 거의 몸에 지녔던 소금 섞은 좁쌀가루로 굶주림을 달래지 않을 수 없었고, 때로는 강냉이나 날밀떡, 호박 같은 것도 구할 수 없어서 세 네 끼씩 굶기가 일쑤였다.

그러면서도 백 여근의 무장을 몸에 걸치고 하루에 백 수십리 길 험산 황야를 가로질러 강행군하면서 피가 튀는 치열한 전투까지 치루었던 것이다. 그 배고픔, 그 추위, 그 투지가 아직 숨소리의 갈피엔 배여 있다. 어찌 내 이를 잊을 수 있으랴!


영하 삼 사십도의 혹한에 눈산이 부서져 나리는 듯한 눈보라 속에서 비록 때 늦게나마 면군복(솜군복)을 입게 되는 것은 천만다행의 행운이었던 일인저! 그뿐이랴. 중상한 전우가 자살을 택하지 않을 수 없는 처절을 눈 앞에서 목도해야 했고, 경상자에게도 소독약 한 번 써본 일이 드물었다.

범례에서 계연수는 “환단 이후로 계속 전수되어 온 삼일심법三一心法(태고 시대 동방의 우주사상의 핵심)이 진실로 이 책 속에 들어 있으니, 동방 대광명의 참 진리가 중흥하는 기틀이 아니고 무엇이랴! 손발이 절로 춤추며 흥겨워 외치고 싶고 기뻐서 미칠 듯 하도다!”라고 벅찬 심정을 토로했다.

 

발간 의의에 대해서도 “우리 자신의 주체성을 발견하게 되었으니 크게 축하할 만한 일이요, 또한 민족 문화의 이념을 표출하게 되었으니 크게 경축할 만한 일이며, 또 한편으로 세계 인류가 대립을 떠나 공존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으니 더욱 경축할 만한 일이다”라고 밝혔다.

 

1914년(51세) 대영절에 계연수는 단학회 동지들과 평안도 삭주 천마산에서 천제를 올리고 혈맹을 맺어 ‘역사 회복 운동을 통한 구국운동’을 다짐하였다.

이듬해 10월 단학회의 근거지를 만주로 옮기면서 관전현 홍석랍자紅石拉子에 배달의숙倍達義塾이라는 교육기관을 열어 청년 학도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단체인 천마대天摩隊,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의민사義民社, 벽파대碧波隊, 기원독립단紀元獨立團 등에 속한 단원들의 사상적 계몽에 주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단학회가 결성된 지 10년이 지난 1919년 3월부터 기관지 <단학회보>를 간행하기 시작하여 제8호까지 발간하였다.

『환단고기』를 간행한 후 역사 회복뿐 아니라 항일 독립운동에도 적극 참여하던 계연수는, 조선인의 민족혼 말살과 역사 파괴에 혈안이 된 일제가 검거할 제1순위 대상이었다.

결국 계연수는 1920년(57세) 조선독립군으로 위장한 밀정의 덫에 걸려 무참히 살해되었다.

일제는 그의 사지를 절단하여 압록강에 버리고 배달의숙 건물에 불을 질러 계연수가 소장하던 3,000여 권에 달하는 서적과 원고를 모두 태워 버렸다.

조선이 일본 제국의 흉포한 야욕에 나라를 완전히 빼앗기고 절망의 벼랑 끝에 서 있던 그때, 인류의 창세사와 한민족의 9천 년 국통 맥을 총체적으로 드러낸 ‘국사학의 아버지’ 계연수는 이렇게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유교사대주의 노선을 걸었던 조선시대에는 환단의 역사를 숨겨서 전수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운초 계연수 선생이 내려오던 한민족 고유사서를 환단고기로 합본하면서 우리 상고사가 전수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우리 상고사가 고스란히 실린 환단고기는 독립운동가들의 사상적 기반이었다.

최근 식민사학계와 그에 동조하는 세력과 언론에서 환단고기를 ‘환빠’로 매도하는 이유는 환단고기가 살아나는 만큼 독립운동사가 살아나고 해방 후 현대사의 주도권을 쥔 외래사대주의자들과 친일파, 그리고 친일식민사학자들의 치부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환단고기』를 죽여야만 자신들이 사는 것이다.

결국 찬란한 선조들의 역사를 죽이는 매국행위를 해야만 자신들의 부귀를 지속할 수 있는 것이다. 『환단고기 역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