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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없다'를 읽고①

진실의 역사

'종교는 없다'읽고①
종교의 역할은 무엇인가?
예수나 석가는 종교를 세우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종교를 만들어 자신을 신봉하라고 가르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가르침을 실천하라고 했다.

불가에서는 살불살조殺佛殺祖라는 말이 있다.

한마디로 수행자가 부처라는 상, 조사라는 상에 갇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부처란 진리를 깨닫고 진리대로 산 사람이다.

진리란 어누 누구에게 특정한 사람에게만 통하는 것이 아닌 모든 사람, 모든 존재를 두루 관통하고 있는 보편적인 사실이다.

부처가 진리를 깨달았다고 해서 진리가 부처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본래의 이치를 깨달은 자를 성인이라 한다.

진리는 우주 전체를 관통하고 있고 진리대로 산 사람이 부처이며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들은 진리를 온 몸으로 체득하여 진리와 한 몸이 되는 길을 제시한 것이다.

기독교의 핵심은 억압 당하고, 병들고 고통 당하는 모든 사람을 해방시키는 데 있다.

그러나 교회가 제도화, 율법화되면서 종교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자기주장이 옳다고만 하며 남을 배척한다.

예수와 석가의 정신으로 돌아가고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 이것이 가장 핵심 가르침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자신의 틀 안에 개념화해 왔다.

고정관념의 틀에서 하나님을 해방시켜야 한다.

예수는 유대 율법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닌 인류보편의 하나님으로 해방을 시켰다.

그 당시 가장 하나님을 잘 믿던 유대교 율법자들인 바리새인, 랍비들이 자신의 종교 안에 갇혀 있던 하나님을 예수는 종교를 초월한 보편적 하나님으로 가르쳤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를 모함했다.

지금의 교회도 그 당시 랍비같이 예수가 다시 온다 하더라도 알아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자신의 종교에만 구원이 있다는 주장은 예수의 사상에 전면 배치되는 주장이다.

후에 예수만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바울의 고백은 그의 고백일 뿐 예수의 가르침은 아니다.

수많은 성직자들은 기독교와 교회에만 구원이 있다고 한다.

 

성경에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같이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린도전서3:16)라고 했다.

21세기에는 종교는 하나라는 말이 더욱 설득력을 얻을 것이다.

종교가 가장 보수적 집단으로 지목받는 이유는 자기 울타리를 치고 이웃 종교에 경계의 눈초리를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는 사랑이나 자비를 강조하며 상대와의 조화를 가르쳐 왔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의 본질과는 달리 상대방을 배척하거나 ‘이단’으로 정죄해 온 것이 종교의 모습이었다.

사랑과 자비를 부르짖는 종교인들이 가장 미움이 많고 이기주의에 빠져 있다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폐쇄적이고 분쟁 지향적인 종교는 조기에 도태되는 운명을 맞이할 것임이 분명하다.

예수님은 우리를 새로운 종교로 부르신 것이 아니다. 새로운 삶으로 부르셨다.

종교는 공존의 원리를 지향해야 한다.

종교가 상대를 인정하는 최소한의 인간적 예우와 존중을 잃어버리고 증오심과 적개심에 사로잡히면 종교로서의 생명을 잃어버리게 된다.

우리나라 선교 초기 서양선교사들이 “한국인은 철학할 때는 불교인이 되고, 예를 갖출 때는 유교인이 되고, 생의 위기에 직면해서는 무속인이 된다”라고 말한 기록이 있다.

이는 한국인의 정서가 모든 종교에 포용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으며, 이는 결코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이같이 사고의 다양성과 복합적인 의미 체계는 종교 다원주의에 비추어 볼 때 상호 종교간의 소통과 상생을 가능케 할 수 있는 미래 지향적 문화의 선봉장이 될 것이다.

 

초기 기독교는 동양의 영향을 받는다. 예수 탄생시 동방박사 내방, 경배설화도 동양의 영향이다.

그리고 페르시아 문명권과 교류를 하고 유대이즘과 헬레니즘의 여려 철학과 종교의 갈래들이 혼합되어 기독교 교리체계가 세워졌음을 부정하지 못한다. 기독교도 혼합 종교인 셈이다.

 

성경 창세기는 수메르 창세기의 모방이라는 것은 이미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유대인들은 400년 동안 이집트 종교의 영향권에 있었고, 바빌로니아 유수시에도 그들의 종교와 사상에 영향을 받았으며 페르시아에서 풀려날 때까지는 페르시아 종교의 영향권에 놓여 있었다.

이집트 종교가 유대교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는 천지창조, 부활, 심판, 동정녀 탄생, 유일신 교리 등을 들 수 있다.

이집트의 아토나톤 십계명은 모세의 10계명으로, 유일신 아톤신앙은 여호와 신앙으로 대체된다.

또한 조로아스터교의 유일신 관념과 선악, 그리고 천사와 악마 등의 이분법적 세계관은 당대 유대교 뿐만 아니라 기독교와 이슬람교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최후의 심판이나 극락, 지옥 같은 말들도 페르시아인들로부터 나온 것이다.

바빌로니아 신화에는 최초의 인간을 진흙으로 빚어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천지를 창조한 뒤 “심히 보기에 좋았더라”라는 구절이 반복돼 나오고 있다.

노아의 홍수 설화도 연대기적으로 먼저인 바빌로니아 홍수설화의 차용이며 뱀에 대한 적대감도 이미 바빌로니아 전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기독교만이 참 종교요, 절대 종교라는 믿음을 견지해 왔다.

그러나 모든 종교는 상대적이라는 종교 다원주의가 인류 미래의 대세임을 알아야한다.

누군가 진리를 독점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 파멸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지구촌 종교분쟁이 끊임없는 이유도 자기 중심적인 자세를 고수하며 살아온 탓이다.

결국 종교간 대화 없이 평화는 없다.

기독교인 가운데 사찰에 들어가 불상을 자르고 불교를 우상숭배라 하는 이들이 많다. 타종교에는 구원이 없다고 생각한다.

진리는 특정 종교의 독점물이 아니다.

석가나 예수는 세상의 모든 진리를 말한 것이 아니다. 석가 예수 이전에도 진리는 존재했다.

따라서 상대방이 믿는 진리에 대해 비판하거나 거짓 가르침으로 난도질하는 것은 신앙인의 자세가 아니다.

자기를 철저히 비워야 상대방을 받아들이게 된다.

독선과 배타성이 강한 것은 깨달음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높은 경지에 올려놓기보다는 무조건 믿으면 된다는 소극적 생각이 강하기 때문이다.

종교학의 창시자인 ‘막스 뮐러’는 한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

남의 종교 상징물을 훼손하고 타 종교인을 벌레 보듯이 하는 한국 종교인들에게는 예수가 칭찬한 백부장의 믿음도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예수의 정신과는 동떨어져 자신이 해석한 교리를 절대화하는 또 다른 우상숭배를 보게 된다.

예수와 석가는 무아적 삶, 자기로부터의 해방을 이룩한 분들이다.

무엇보다 자기중심적 삶에서 벗어나 초월적, 실재 중심의 삶으로 전환함으로써 온 세상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이다.

예수와 석가가 새로운 사상과 세계관을 보여 줄 수 있었던 것은 철저히 자기를 부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자신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고,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인간을 이해했다.

석가도 깊은 깨달음을 통해 진리의 눈으로 인간을 이해했다.

고정관념에 얽히거나 어느 한 가지 관점에서 얻어진 결론을 절대시 하지 않을 때 진리는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무지와 미망과 허상을 깨버리고 일실우일신 하는데 목적이 있다. 그것이 열린종교의 모습이다.

정치의 적폐청산은 이 시대를 지배하는 종교사관의 혁신없이는 불가능하다.

자신의 종교만이 절대 진리라는 벽을 허물고 이제 우리 사고 안에 갇힌 신을 해방시켜야 한다.

그래야 사회 곳곳의 갈등을 해소하고 좌우갈등과 남북통일의 번영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종교는 없다' 책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