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전봉준'에 해당되는 글 2건

  1. 근대사 갑오동학농민전쟁
  2. 환단고기와 독립운동사①

근대사 갑오동학농민전쟁

진실의 역사

근대사 갑오동학농민전쟁

 

“전명숙(全明淑)이 도탄에 빠진 백성을 건지고 상민(常民)들의 천한 신분을 풀어 주고자 하여 모든 신명들이 이를 가상히 여겼느니라. 전명숙은 만고(萬古)의 명장(名將)이니라. 벼슬 없는 가난한 선비로 일어나 천하의 난을 동(動)케 한 자는 만고에 오직 전명숙 한 사람뿐이니라.”
- 도전 4편 11장

 

사진은 전봉준全琫準(전명숙全明叔) 장군을 찍은 유일한 사진이다.

시점은 1895년 2월 27일 (이하 양력)이고 장소는 서울이다. 서울의 일본 영사관에 갇혀 있던 전 장군이 심문을 받기 위해 법무아문法務衙門으로 이송되기 직전의 모습이라고 한다. 압송에 참여한 일꾼들의 심드렁한 표정에서 이번 행차가 여러 번 반복되는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주변에 녹지 않고 쌓여 있는 눈들이 아직 겨울 추위의 여파가 가시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실패한 거사의 모든 책임을 지는 패장이건만 그의 기상은 여전히 세상을 뒤흔드는 혁명가의 그것이다. 아직 체념하기에는 분노가 너무 컸을까. 아마도 참혹하게 죽어간 동지에 대한 죄책감과 자신의 부족에 대한 한스러움도 되씹고 있었으리라.

 

혹시 몰락해 가는 조선이라는 나라에 태어난 자신의 운명을 탓하지 않았을까?

더 나아가 선천 상극의 세상, 모든 것이 삐뚤어질 수밖에 없는 천도 섭리를 원망하고 있었다면 너무 사치스런 추측일까?

 

1894 갑오년의 동학농민전쟁, 아마도 근대사에 이 사건만큼 우리 민족에게 절망감을 안겨 준 비극도 없을 것이다.

동학은 1870년대 후반부터 경상·충청·전라의 삼남 지방에 뿌리를 내렸다.

열강들의 침입, 중앙 정부와 지방 수령의 탐학으로 조성된 불안하고 원망 어린 사회 배경을 타고 동학은 농촌과 지식인들에게 빠른 속도로 퍼져 갔다.

 

종교 운동으로 시작한 동학이 사회 변혁 운동으로 돌변하도록 불을 놓은 인물은 단연 탐관의 대명사 고부 군수 조병갑이다.

1894년 2월 전봉준은 1천의 농민을 이끌고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아전들을 처단하고 양곡을 몰수하여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사실상 혁명의 시작이었다. 잠시 진정되는 듯했던 혁명은 안핵사 이용태의 탄압으로 다시 폭발했다.

 

1894년 4월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든 농민군들은 이후 황토고개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인근 고을을 점령해 나갔다. 5월에 전주 감영을 점령하고 6월 초순에는 전라도 일대가 사실상 농민군의 지휘하에 들어갔다. 정부와 농민군은 휴전 교섭을 벌여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었다. 대부분의 농민군들은 일상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국제 정세는 점점 불안하게 꼬이고 있었다. 청군이 아산만을 통해 들어오고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일본군이 인천을 통해 서울로 들어와 경복궁을 점령하였다.

 

청·일 양국군의 대치 상태는 드디어 7월 25일 전쟁으로 비화됐다. 일본군의 왕궁 점령과 부당한 내정 간섭에 분개한 농민군은 이해 10월 척왜斥倭를 구호로 내걸고 재기했다. 이제는 내정 개혁을 목표로 하지 않고 일본과의 항쟁이라는 반反외세가 거병의 주요 목표였다. 남접과 북접의 연합으로 수십만으로 불어난 농민군은 서울을 향해 북상하다가 공주 우금치에 이르렀다.

 

약 1주일간 50여 회의 공방전을 벌인 이곳에서 농민군은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처절한 패배를 당한다. 이후 농민군들은 일본군과 관군 연합에 쫓겨 금구, 원평으로 후퇴했다. 국토의 구석으로 내몰린 생존 병력은 일·관군의 소탕 작전에 지리멸렬하게 되고 결국 농민군의 지도자 전봉준은 순창에서 체포된다. 1895년 4월 23일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당년 41세의 젊은 나이였다.

 

한때 60만에 달했던 동학농민군들 중 30만이 무참하게 학살당하면서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다. 동학농민군들은 애국적이고 애족적인 동기에서 거사했지만 당시의 시대 과제를 이해하지 못했고 혁명 전략도 정확하게 세우지 못했다. 결국 외세의 개입과 정부의 탄압으로 인해 예정된 실패의 길로 들어서고 만다.

 

일찍이 동학은 1860 경신년 4월 초 5일 경주 사람 최제우 선생이 천상의 상제님과 문답을 통해 도통을 받고 창시하였다.

이후 “유도 불도 누천년에 운이 역시 다했던가.”라는 그의 외침은 민초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사람들은 ‘다시 개벽’ 사상으로 세상의 변혁을 꿈꿨고, ‘무극대도’가 다스리는 ‘오만 년’ 조화 세상을 염원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동학의 핵심에는 ‘시천주侍天主’가 있다.

‘인간으로 오시는 천주님을 모신다’는 이 메시지는 너무나 큰 파격이기에 오히려 민중들의 의식에 접속되지 못했다. 천주님이 누구신지, 천주님은 언제 어디로 오시는지, 왜 천주님이 오셔야만 하는지 등 천주에 대한 많은 담론들이 문화 운동으로 채 발전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천주에 대한 이해 부족은 이후 전개된 동학 운동의 치명적 한계였다.

 

인간으로 오신 상제님께서는 “원래 동학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주창하였으나 때가 때인 만큼 안으로는 불량하고 겉으로만 꾸며대는 일이 되고 말았나니 다만 후천 일을 부르짖었음에 지나지 못함이라.(도전 5:205)”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상제님은 전명숙 장군의 정신만은 높이 평가하셨다. 동서양 창업군주와 명장들의 반열에서 전명숙을 제일 첫머리에 놓으신 것이다. 또 그를 천상 조화정부造化政府의 조선 명부대왕冥府大王에 임명하시어 신명으로나마 후천 선경 건설에 역사하게 하셨다.

 

상제님은 그가 잡힌 피노리에 직접 가시어 사명기司命旗를 세워 그의 한을 풀어 주셨다. 사명기는 임금이 각 영營의 대장에게 내리는 지휘기다. 우국충정憂國衷情으로 외세를 몰아내고 왕정王政을 바로 세우고자 거사한 그에게 왕의 신임을 상징하는 사명기가 없는 것은 천추의 한이었다.

상제님께서 직접 사명기를 꽂아 주심으로써 동학혁명은 상제님의 천명으로 후천개벽의 문을 열어 놓은, 천도혁명의 출발점으로 자리매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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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와 독립운동사①

진실의 역사

환단고기와 독립운동사

천 년의 세월에 걸쳐 쓰인 다섯 권의 사서를 한 권의 『환단고기』로 묶은 인물은 바로 1864년 평안도 선천에서 태어난 운초 계연수(1864~1920)이다. 자신의 집안에서 보관해 오던 책과 지인들로부터 구한 책을 한 권으로 엮어 편찬한 것이다.

 

안함로의 『삼성기』는 운초의 집안에 전해 오던 것이었고, 원동중의 『삼성기』는 태천에 살던 백관묵白寬默에게서 구하였다. 『단군세기』 또한 백관묵의 소장본이고, 『북부여기』는 삭주 뱃골 사람 이형식李亨植의 소장본이었다. 『태백일사』는 운초의 스승인 해학 이기李沂의 집안에 전해 오던 것이었다.

 

백관묵(1804~?)은 문재로 이름이 높은 명문 집안 출신으로 헌종 6년(1840) 식년시式年試에 진사로 합격하였고 많은 책을 소장하고 있었다.『백관묵의 집안은 대대로 학자 집안이었을 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 때 그의 아들과 손자들은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

일간지 <문화경제신문>의 기사에 따르면, 아들 백삼규白三圭(1855~1920)는 유학자이자 의병장이었다. 백삼규는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을 계기로 의병 운동을 시작하여, 1910년 경술국치 후 큰아들 인해仁海를 데리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농무계農務契와 환인계를 조직하여 애국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지도하였다.

1919년에는 대한독립단을 조직하고 부총재에 추대되었으며,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보민회保民會, 일민단日民團, 강립단强立團 등을 숙청하는 활동을 벌이다가 이듬해 일본군에게 붙잡혀 총살당하였다. 백삼규의 장남 인해도 독립단에 가입해 활동하던 중 1921년 불심검문에 걸려 격투 끝에 순국하였고, 그 후 둘째 인제仁濟도 순국하였다.

삼부자가 모두 일제에게 희생되어 구국의 충혼으로 승화한 것이다.<문화경제신문>, “화서학파華西學派 인물열전” 246회, 2011.4.9.

 

그리고 이형식은 1796년생으로 백관묵과 같은 해에 식년시 생원과에 합격하였다. 계연수가 이형식을 생원이 아니라 진사라고 부른 것은 그의 부친 이사겸李嗣謙이 진사로 합격한 내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형식 소장본에는 『단군세기』도 합본되어 있었는데, 그 내용이 백관묵의 『단군세기』와 동일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환단고기』가 탄생하기까지 백관묵과 이형식을 비롯한 많은 사람의 공덕이 있었지만, 특히 계연수와 이기의 혈성과 희생이 컸다.
이기(1848~1909)는 전라도 만경 출생으로 정약용의 학통을 계승한 실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다.

15세 때 향시鄕試에 나가면서 뛰어난 재주와 명성이 여러 고을에 알려졌다. 이기는 당시 유명한 선비들과 교유하였는데,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1840~1910),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과 더불어 ‘호남의 삼재三才’라 불리었다.

 

이기의 문장에 대해 이정직은 “대개 백증(이기의 자)의 글은 쓸데없는 글자나 구절이 없어서 마치 꽃 중의 꽃이요, 곡식의 자양분과 같고, 따뜻하고 윤기가 있으며, 법도에 맞고 아담하다”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이건창李建昌(1852~1898)은 “백증의 문장은 수를 놓은 비단이다”라고 평하였고, 황현도 “씩씩하고 뛰어나며, 뛰고 달리는 기운이요, 특출하게 아름답고 박학한 문장이다”라고 칭찬하였다.

 

성리학과 실학을 모두 섭렵한 이기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였고, 저항의 일선에서 애국 활동을 하였다.

1894년(고종 31)에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동학군 최고 지도자인 전봉준을 찾아가서 ‘동학군을 이끌고 한양으로 올라가 간사한 무리를 물리치고 임금을 받들어 국가의 질서를 새롭게 하자’는 뜻을 전했다. 전봉준은 이기의 뜻에 호응하여 남원에서 동학군을 지휘하던 김개남과 협의하도록 하였으나 협의는 실패로 돌아갔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노골적으로 조선에 침투해 오자 농민생활의 안정과 국권을 회복하는 데에는 토지개혁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여, 서울로 올라가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 어윤중魚允中을 만나 토지제도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뒤, 전후戰後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강화회의미국 포츠머스에서 열릴 때, 이기는 동지들과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의 독립을 보장해 달라는 호소를 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여권이 나오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미국행에 실패한 이기는 동향 후배이자 동지인 나인영羅寅永(나철羅喆, 1863~1916)을 비롯한 몇 명의 독립운동가와 그해 8월 일본으로 건너가 일왕과 일본 정계 요인들에게 조선 침략을 규탄하는 서면 항의를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적 투쟁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그해 11월 소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12월에 귀국하여 서울에 머물던 이기는 곧 이어 모친상을 당해 귀향하였다. 그러나 국권이 기울어지는 위급한 시기였으므로 ‘상복을 벗어버렸다’는 비난을 무릅쓰고 다시 상경하여 한성사범학교 교관으로 들어가 후진 양성에 진력하였다.

또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고 월보를 발행하여 국민 계몽에 앞장섰다. 이기는 교육의 목적을 국권 회복에 두고, 교육을 통하여 자강自强, 자급自給으로 실력을 길러 나라를 지키자고 주창하였다.

 

1907년에는 육순의 나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인영, 오기호, 윤주찬, 김인식 등과 을사오적乙巳五賊 암살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계획이 실패로 끝나 7년의 유배형을 받고 진도로 귀양을 갔다.

다행히 2년 후에 석방되어 서울로 돌아온 이기는 『호남학보湖南學報』를 발행하고, ‘단군 성조의 얼을 기리고 고조선의 역사를 부흥시키자’는 취지로 단학회檀學會를 조직하여 계몽운동과 구국운동을 계속 펼쳤다.

하지만 끝내 국세가 기울자 1909년 7월 13일 서울의 한 여관에서 절식絶食으로 62년의 일생을 마쳤다.

 

이기의 생애에서 특히 시선을 끄는 것은, 이기가 『단군세기』를 쓴 이암과 『태백일사』를 쓴 이맥(이암의 현손)의 후손이라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이기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역사서를 읽었고, 우리 고대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쌓게 되었다.

그가 계연수에게 전해 준 『태백일사』도 집안의 가보家寶로 전해오던 것이다.

이러한 이기를 스승으로 모셨기 때문에 계연수는 『환단고기』를 발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계연수에 대한 기록은 『해동인물지』(1969)와 『정신철학통편』(1920) 외에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계연수의 간략한 생애가 기록된 『해동인물지』에 따르면, 계연수의 자는 인경仁卿, 호는 운초雲樵이고 평안도 선천에서 살았으며, 이기의 문하생이 되어 백가百家의 책을 섭렵한 후 무술년(1898)에 『단군세기』와 『태백유사太白遺史』 등을 간행하였다.

기미년(1919)에 임시정부의 이상룡 막하에 들어가 참획군정으로 공을 세우고 경신년(1920)에 만주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정신철학통편』은 계연수가 묘향산에서 석벽에 새겨진 『천부경』을 발견한(1916)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지난 30여 년 동안 안경전 역주자는 『환단고기』를 연구하고 서지학적 정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현 단단학회檀檀學會 회장인 양종현(1948~ )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를 통해 계연수의 실체를 좀 더 분명하게 파악하게 되었다.

 

양종현은 『환단고기』의 전수자인 이유립의 증언을 바탕으로 계연수의 생존 당시 모습을 초상화로 그려 소장하고 있었다.

양종현씨는 환단고기가 이유립선생의 창작이라는 강단 식민사학의 음해에 대노를 했다.

그는 공부를 할 때 끌로 판 목판 인쇄본의 글자를 한 글자씩 짚어가며 스승님과 같이 공부를 했다고 확고하게 증언하고 있다.


계연수는 1864년에 평안도 선천에서 태어났다. 일찍 부모를 여의었는데,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한 번 보면 곧바로 외울 만큼 기억력이 뛰어났다. 동방 한민족의 옛 역사와 민족정신에 관심이 지대했던 그는 27세(1890) 때까지 약초를 캐어서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여러 양반가와 사찰에서 비장하던 서책과 금석문, 암각문 등 각종 사료를 수집하였다.

한민족의 역사를 밝히고자 한 계연수가 뜻을 이룰 수 있게 된 결정적 계기는 해학 이기와의 만남이었다.

1897년(34세)에 이기의 문하에 들어간 계연수는 스승의 가르침 아래, 그로부터 두 해 동안에 이암의 『태백진훈』과 『단군세기』 그리고 『참전계경』, 『태백일사』, 『천부경요해』 등을 간행하였다. 『환단고기 역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