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만큼 보인다

인류 창세사를 다시 쓰게 한 홍산문화③

진실의 역사

인류 창세사를 다시 쓰게 한 홍산문화


【세계 최고最古의 옥玉 문화】
6천여 년 전에 벌써 국가 단계의 복잡한 문명을 일구었다는 사실도 인류의 창세사를 다시 쓸 만큼 충격적인 일이지만, 홍산문화가 세계인을 정말 놀라게 한 것은 바로 정교하고 다양한 옥玉문화이다. 
  
특히 발해연안 지역의 무덤에서 공통적으로 옥기 부장품이 쏟아져 나왔다.

한나라 때 자전인 『설문해자』에 ‘옥玉’ 자를 설명한 내용을 보면, ‘신령 령靈’자는 밑의 무巫가 옥(가운데 ‘입 구口’ 자 3개)을 통해 신과 소통한다는 뜻이라 했다. 인간과 신 사이의 연결자인 무인이 신에게 헌납하는 예물이 바로 옥인 것이다.

중국의 고증학자 왕궈웨이王國維의 해석에 의하면 ‘예禮’ 자는 본디 제기를 뜻하는 ‘두豆’ 자 위에 두 개의 옥[曲]을 올려놓은 형상이다. 즉 예라는 것은 ‘옥을 바쳐 신을 섬기는 것’이다. 요컨대 선사 시대의 석기와 토기는 생활용품이었지만, 옥기는 신을 섬기는 예기로 제작되었다(이형구·이기환, 같은 책, 156~157쪽).
  
이형구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발해연안 고대 문화 중에서 가장 큰 특징은 옥문화입니다. 고대인들의 신앙적인 마음에서 옥을 선호하고 중요하게 여긴 것으로 생각합니다. 변하지 않고 영원불멸하는 옥의 특징을 보면, 용 신앙이라든지 새 신앙이 우리 민족, 동이족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나라 영덕 강구면 오포리에서 나온 곡옥을 보면, 그 모양에 입이 있고 구멍도 나 있어서 어떤 사람은 태아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누에 같다고도 하지만 저는 용이라고 봤습니다.

홍산문화 대릉하 유역에 적석총이나 석관묘에서는 약 20센티미터의 옥이 나오는데 고리에다 끼워서 가슴에 걸었던 것으로 이 또한 용의 형상입니다.

“한국의 곡옥은 용의 변천일 것이다. 중국 사람들은 용신앙의 기원하면 중원지방에서 나온 것으로 알고 있지만 만리장성 너머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중국은 최초의 용의 형상화뿐 아니라 중국문화의 원류가 중원이 아니라 동북지방이라는 것에 깜짝 놀랐다. 그래서 중국은 동북공정을 시작한 것이다.”

부장품이 나온 31기의 묘 가운데, 신석기 시대 무덤에서 흔히 보이는 토기와 석기는 단 한 점도 없이 옥기만 발굴된 묘가 26기나 된다.

특히 제2지점 21호 묘의 남성 인골은 옥으로 옷을 해 입은 듯하다. 옥거북, 옥베개, 옥패玉牌, 옥벽玉璧 등 무려 20점의 옥 장식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시신을 치장하고 있다.

제5지점 중심 대묘에 누워 있는 남성 인골은 양 귀 밑에 옥벽, 가슴팍에 옥장식, 오른팔에 옥팔찌, 양손에 옥거북이 치장되어 있었다. 신령한 거북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죽어서도 신과 소통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이 무덤의 주인공은 제정일치 시대의 제사장이자 정치적 수장으로 간주된다.

 

부장품으로 옥기를 사용한 것은 옥이 변하지 않는 보석으로 영생불멸을 뜻하기 때문이다.

『설문해자』에서 옥을 ‘오덕五德을 갖춘 아름다운 돌’이라 하였고, 공자는 ‘군자는 옥으로 덕을 견준다’고 하였다(君子比德於玉焉(『예기』「빙의聘義」). 그리고 『주역』 「설괘전」에서는 팔괘의 첫째인 건乾괘의 성격을 옥으로 표현하였다(건은 … 옥이다[乾, … 爲玉] 『주역』「설괘전」).

그 까닭은 옥이 하늘의 빛깔과 하나님의 신성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동양에서는 천상의 수도를 옥경玉京이라 불렀고, 옥경에 거하며 삼라만상을 다스리는 우주의 통치자 하느님을 옥황상제玉皇上帝라 부르며 모셨다. 

그래서 홍산인들은 옥을 고귀한 신분을 나타내는 장신구, 신과 소통하는 신물, 천제에 사용하는 제기 등의 소재로 사용하였다. 
  
흔히 고대를 석기-청동기-철기의 3단계로 구분한다. 하지만 발해연안 영역에서 옥기로 뒤덮인 수천 년의 유적지가 대량 발굴됨에 따라 중국학자들은 청동기 이전에 옥기 시대를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고대 동북아의 옥은 홍산문화보다 더 오래된 흥륭와문화(BCE 6200~BCE 5200)에서 발견되기 시작한다.

내몽골 자치구의 오한기敖漢旗에 위치한 흥륭와촌에서 세계 최초의 옥결玉玦(옥 귀걸이)이 발굴되었다. 이 옥결에 사용된 옥은 요동반도의 수암에서 나온 수암옥岫岩玉이다. 수암은 흥륭와촌에서 동쪽으로 450km나 떨어진 곳으로 압록강에서 멀지 않다. 당시 만주의 동쪽에서 난 옥을 서쪽으로 가져가 옥제품으로 가공할 만큼 만주의 동서가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흥륭와문화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옥결이 한반도 동해안과 남해안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특히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 선사유적지의 옥결은 그 외양이 흥륭와문화의 그것과 아주 유사하다. 이러한 유사성은 BCE 6천 년경부터 요서, 요동, 한반도가 하나의 문화권이었음을 뜻한다. 그리고 흥륭와문화에서 시작된 옥 문화가 후대의 홍산문화에서 더욱 다양하고 화려해진 점은, 하나의 연속된 문명이 3,4천 년 동안 지속적으로 발전을 거듭하였음을 보여준다.
  
홍산문화의 옥기 유물을 보면 재질은 수암옥(청황옥青黃玉)이 대부분인데 그 색상은 천연 옥색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도료와 같은 것으로 채색을 한 것도 있다. 검은색의 흑피옥도 출토되었는데, 흑피옥은 중국의 신석기 유적에서는 출토된 바가 없다.
  
요컨대 홍산문화는 동북아 신석기 문화의 최고봉으로서 중국 한족의 것과는 계통이 전혀 다른 문화이다.

오히려 그들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환단 시대 배달 동이족의 독자적인 문화이다.

시베리아과학원의 고고학자 세르게이 알킨 교수도 홍산문화의 독자성에 대해 “홍산문화는 중원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중원문화가 홍산문화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용 문화에 대하여 “중국의 용 문화는 독자적으로 발생하지 않았다. 고대 중국의 기록을 보면 북방 이민족 가운데 용을 토템으로 하는 민족도 있었다고 하는데, 바로 홍산문화의 주인공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라고 구체적으로 밝혔다. 용봉문화의 주인공은 바로 홍산인이었다.

중국에서는 요하지역에서 발견된 이 유적을 ‘신비의 왕국’또는 여신상이 발견되어 ‘여왕국’이라고 부른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문명이었다는 요하문명은 그동안 부단히 고조선 영역이라고 주장되던 곳이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단군조선보다도 빠른 기원전 3,000년~3,500년경에 이미 고대국가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한민족사로 본다면 문헌기록상 배달국에 해당하는 시기다. 중국은 그동안 황하유역에서 태어난 선진 문화가 각지로 전파 됐다는 황하 중심문화를 기본정설로 고수해 왔었다. 

그러나 만리장성 밖에서 기원전 3000~3500년전에 요하지역에 고대국가가 존재한 것이 확인된 것이다.

중국은 이를 근거로 그동안 전설속의 인물이던 삼황오제를 중국의 실존역사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기원전 2,333년에 단군조선이 실재했냐 아니냐, 논쟁을 벌이는 동안 중국에서는 우하량 지역의 신비의 왕국을 중국 시원사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우하량 지역 즉 요령지역은 그동안 빗살무늬토기, 돌무덤, 비파형동검 등이 발견이 되어 동이족의 근거지로 비정되던 곳이었다.

이런 유물들이 나온 지역이라면 우리 조상들이 거주했던 터이며 이런 유물들은 고조선의 표지 유물들이다.

이런 홍산 유적이 우리 고대사임일 밝혀주고 있는 사서가 바로 『환단고기』다. 홍산문화는 환단 시대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올바르게 해석할 수 없다. 환국·배달·고조선이라는 동북아 시원역사를 인정해야 홍산문화를 포함한 발해연안의 그 엄청난 유적과 유물을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 왜 홍산문화를 알아야 하는가
이렇게 유적과 유물이 대부분 ‘사상 처음’이고 ‘인류사 최고最古’인 홍산문화를, 중국은 황하문명보다 2~3천 년 앞선 황하문명의 원류로 규정하였다.

그런데 황하문명의 원 뿌리가 오랑캐 땅이라 치부하던 만리장성 이북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이 중국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중국은 이 난처함을 다민족 역사관으로써 해결하였다. 한족과 55개 소수민족으로 이뤄진 중국 땅에서 발견되는 소수민족의 문화와 역사는 모두 중국의 문화와 역사라는 것이다.
  
현재 중국은 홍산문화를 요하문명이란 이름으로 전 세계에 소개하면서 중국을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문명보다 앞서는 세계 최고最古 문명국으로 내세우고 있다.

홍산문화를 정점으로 화려한 꽃을 피웠던 문명은 요하 일대에서 집중적으로 발굴되고 있어 일명 ‘요하문명’이라 불린다.

환단 시대의 한민족 문화를 자신들의 문화로 둔갑시켜 이제 경제대국에서 문화대국까지 꿈꾸는 것이다.

홍산문화를 황하 문명의 뿌리라 하여 자기네 문화로 둔갑시켰지만, 심정적으로는 동방 한민족 문화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중국 정부는 2000년대 후반, 우하량을 관통하는 4차선 도로를 놓아 유적지를 은폐하였다. 홍산문화가 밝혀질수록 중국이 진행하는 동북공정에 불리해지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유적을 파괴한 것이다.
  
중국이 미래의 중심 국가가 되려는 야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이때, 환단시대를 인정하지 않는 한국의 강단사학자들은 홍산문명에 대해 침묵하거나 우리 역사와 관계없는 것으로 부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 식민사학이 지배해 온 거짓 역사의 미몽에서 깨어나 잃어버린 시원 역사와 문화를 되찾자!

그리고 한민족의 원형문화를 회복하여 웅대한 미래를 열어나가야 한다. 『환단고기 역주』

인류 창세사를 다시 쓰게 한 홍산문화②

진실의 역사

인류 창세사를 다시 쓰게 한 홍산문화

 

【찬란한 청동기 문명을 꽃피운 고조선
기존의 강단 사학계는 한국의 청동기 시대가 기껏해야 BCE 1300년을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한국사의 청동기 시대는 그보다 천 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한민족이 BCE 2500년경에 이미 청동을 사용하였음을 보여주는 유적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요서 지역의 하가점 하층 문화가 바로 그것이다. 이 문화는 황하 유역의 BCE 2200년경, 시베리아 지역의 BCE 1700년경보다 이른 시기에 시작된 청동기 문화이다. 내몽골의 적봉시를 중심으로 발해만 일대, 요령성의 의무려산 일대까지 뻗어 있던 하가점 하층 문화는 산성山城의 존재와 출토 유물 등으로 볼 때 황하 유역의 중국 문화와 성격이 다른 별개의 문화였다. 이 지역은 고조선 강역이었던 곳으로 하가점 하층 문화는 곧 고조선 문명의 일부이다. 
  
이 유적의 발굴은 청동기 문명을 고대 국가의 출현 조건으로 보는 한국의 주류 사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청동기가 고대국가 성립의 필요조건은 아니다. 중남미의 경우 청동기가 없이 석기만으로도 고대국가가 건설되었으며, 고대 이집트 왕조도 청동기 문명에 기초하여 성립된 것이 아니다. 후기 베다 시대(BCE 1000~BCE 600)에 나타나기 시작한 인도의 통일 국가도 청동기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성삼제, 『고조선 사라진 역사』, 49쪽). 청동기 문명이 있어야만 국가가 탄생할 수 있다는 강단사학자들의 주장은 근대 실증사학의 일방적인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한국 주류 사학계에서는 한국의 청동기 시대를 BCE 1300년 이후로 설정하고, BCE 1300년이 지나서야 한민족의 고대 국가가 탄생하였다고 주장해 왔다.
따라서 고조선을 인정하는 듯하지만 속 내용에 들어가면 강단사학에서는 삼국유사의 BC2333년에 건국했다는 기록을 인정하지 않는다. 단군을 신화 속 인물로 규정을 하는 것이다.

단지 고조선은 BC 10세기 이후 부족국가를 이루어서 발전해나가다 위만조선이 고조선을 계승했고(BCE 194), 위만조선이 한나라에게 망한(BCE 108) 후 고조선이 있던 그 자리(한반도 북부)에 한나라가 네 개의 군[漢四郡]을 설치하였다고 가르친다. 그것도 지금의 북한의 평양 부분에 작은 나라였던 고조선(위만)을 한무제가 무너뜨리고 식민지를 삼은 후 철기문명을 전해줘서 국가가 크게 발전했다는 것이다. 조선을 계승한 북부여는 온데간데 없고, 중국의 식민지인 위만조선과 한사군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한민족 고대사는 부족국가 족장 형태로 건국이 되었고 3천 년을 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식민주의 사학자들은 태곳적 환단 시대를 고증되지 않은 신화시대로 만들어 버리고, 그 대신 ‘위만조선과 한사군’ 시대를 한민족의 상고 시대라 정의하였다. 지금 이들은 ‘식민사학을 극복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로 들어가면 아직 식민사학 논리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그러면서 언론에서 고대사 복원을 하려는 민족사학자들 주장에 대하여 나라가 큰 게 자랑이 아니라며 조롱을 한다. 있는 사실을 이야기하는데 큰 나라 주장은 제국주의 논리와 같다라며 강변을 한다. 일제 강점기 한민족 지배를 위해서 만든 식민사학은 한민족은 타민족의 지배를 받아서 국가가 발전했다는 타율성론을 주장하면서 일제 식민시대의 정당성을 합리화하기 위한 일제의 논리였다. 한민족사는 고대에도 식민지로 발전하고 근대에도 식민지로 발전했다는 논리다. 그런데도 해방된 지 70년이 넘고 있건만 한국 사학계는 이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와 현 역사학계는 위만이 본 조선을 탈취하여 세운 정권을 위만조선이라 부른다. 고조선의 정통을 계승한 또 다른 조선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위만조선’이라는 것은 고조선의 서쪽 영토인 본 조선을 강탈하여 지배한 ‘위만정권’에 불과하다. 자주적인 한국사를 구축하려 하였던 18세기의 실학자 안정복은 위만을 ‘권력을 부당하게 참칭한 도적[僭賊]’이라 하였다(『순암 집順菴集』「동사 문답東史問答」).

이와 같이 식민사학자들은 ‘BCE 2333년에 고조선이 건국되었다’는 『환단고기』의 기록을 신뢰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환단고기』가 밝힌 고조선 강역에서 이 기록을 뒷받침하는 유적이 발굴되었으니, 고조선사를 축소·은폐하던 강단의 식민 계열에서는 이제 고조선사를 새롭게 정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하가점 지역을 포함한 요서, 요동, 만주 및 중국의 허베이성, 산둥성 일대 등에서 발견된 고조선의 청동기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것이 비파형 동검(중국에서는 이를 ‘곡인단검曲刃短劍’이라고도 함)이다. 비파라는 악기처럼 생긴 이 청동 검은 중국 중원 지역과 시베리아 지역에서는 출토되지 않는다.
비파형 동검은 청동과 아연의 합금으로 그 재질이 단단하고 강하다. 주로 납으로 만들어 쉽게 무디어지는 중국의 검과는 다르다. 청동과 아연은 비등점이 서로 달라 두 금속의 합금을 만드는 데에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이것만으로도 4천여 년 전 고조선 문명의 높은 수준을 가늠케 한다.

 

그런데 비파형 동검은 한반도 북부뿐 아니라 충남 부여와 전남 여천 등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한반도 전역이 내몽골, 요서, 만주 일대와 동일한 문화권에 속했고, 고조선의 영역이 요서에서 한반도까지 걸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비파형 동검 유물 분포는 환단고기의 환단 시절의 기록을 더욱 명확하게 증명해 주고 있다. 환단고기 기록이 자신의 논리와 다르다고 무조건 위서로 몰기보다는 학자라면 열린 자세로 진지한 연구가 필요한 이유다.
  
고조선의 청동기 제작 기술은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고조선의 수준 높은 청동 제련 기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 다뉴세문경多鈕細紋鏡(여러 꼭지 잔줄 무늬 거울)이다. 직경 21.2cm 안에 0.22mm 간격으로 13,000개에 이르는 가느다란 선을 넣은 다뉴세문경은 고조선 지역에서 발굴되었다. 주석의 비율이 27%에 달하여 매우 견고할 뿐 아니라 빛을 밝게 반사하는 이 청동 거울은 강단사학계에서 보는 것과 달리 고조선이 고도의 청동기 제작술을 자랑하는 동북아 문명의 주역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고조선의 거석, ‘고인돌’
고조선은 높은 수준의 청동기뿐 아니라 거석 유적에 속하는 고인돌도 많이 남겼다. 고인돌은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에 나타난 돌무덤 형식의 하나로 동북아시아와 유럽 일대에 걸쳐 많이 나타난다. 아시아에서는 특히 고조선의 영역이었던 만주와 한반도에 많이 남아 있다.

한반도의 경우 정확한 숫자를 모를 정도로 많은데 대략 4만 기 정도로 추정한다. 전북 고창과 같이 100여 기 이상 밀집된 곳도 있다. 고인돌에 사용된 판석의 무게는 적게는 10톤에서 많게는 300톤에 이른다. 거대한 판석을 떼어 무덤까지 옮기려면 수백 명의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상당히 조직화된 사회를 전제로 한다.

 

고인돌의 모양은 음양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뚜껑돌은 양으로 하늘(아버지)을 상징하여 1개[天一]이고, 받침돌은 음으로 땅(어머니)을 상징하여 2개[地二]로 이루어졌다. 뚜껑돌, 받침돌, 피장자被葬者는 각기 천, 지, 인을 상징하여 삼재 사상을 나타낸다. 고인돌에도 신교의 천지 음양과 삼신 사상이 녹아 있는 것이다. 고인돌은 무덤으로 시작되었지만, 제단이나 마을의 상징물 구실도 하였다. 제단 고인돌은 주로 독립적으로 나타나는데, 시신을 묻었을 것으로 보이는 무덤방이 없다.
  
고조선의 주 무대였던 만주와 요서 지역에서 발굴되는, 그 형성 연대가 더 오래된 고인돌은 차치하더라도, 한반도에서 발견된 고인돌만 해도 BCE 2000년 이전의 것으로 측정된다. 미국의 고고학자 사라 넬슨 Sarah Nelson은 경기도 양수리 고인돌에서 발굴된 유물의 연대를 BCE 2665~2140년 것으로 추정한다. 북한 학자들은 우리나라 고인돌이 BCE 4000년대 후반기에 생겨나 BCE 2000년대 전반기까지 성행했다고 본다(성삼제, 같은 책, 70쪽).
  
고인돌의 출토 범위와 건축 추정 시기 또한 비파형 동검과 마찬가지로 『환단고기』가 전한 고조선의 실존을 증명한다. 하지만 국내 강단사학자들은 한반도 고인돌의 방사능 탄소 연대 측정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단군의 고조선 건국을 신화로 보는 그들로서는 애써 외면해야 할 고고학적 자료인 것이다. 학자로서 실증사학을 주장하는 그들이 사실보다는 자신들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이다.

 

고인돌에서 보듯이 고조선은 중국과 뚜렷이 구별되는 독자적인 상례喪禮 문화를 갖고 있었다. 정명악은 우리의 상례 문화를 단순히 중국의 유교 문화의 소산으로 보는 것은 큰 잘못이라 지적한다. ‘요여腰輿(혼백과 신주를 모시는 작은 상자)’ 안에 혼백상자를 만들어 넣고, 그 혼백상자를 상여 앞에 모시는 것은 신을 그다지 중히 여기지 않는 유교와 전혀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조선의 상례 문화가 중국과 달랐고 중국보다 더 발달한 것은 공자의 말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공자는 “소련과 대련은 상례를 잘 치렀다. 사흘 동안 게으르지 않고 석 달 동안 해이하지 않으며, 1년 동안 슬퍼하고 3년 동안 근심하였으니 동이의 자손이다”라고 하였다(孔子曰 ‘少連大連善居喪, 三日不怠, 三月不懈, 期悲哀, 三年憂, 東夷之子也’ 『예기』 「잡기하雜記下」). 『소학』에도 같은 기록이 전한다.

 

환단고기 『단군세기』에 부루 단군제에 소련 대련의 부모 삼년상의 유래가 기록돼 있다. 환단고기 기록이 조작이라고 한다면 환단고기 기록자들은 천재와 같다. 그 시대에 정보검색이 불가능한 시대에 수많은 내용들을 전부 알고 기록을 하였다는 것이 되니까 말이다.

 

공자는 소련과 대련 형제를 동이족으로 규정하면서 그들을 3년 상을 치른 효행의 대명사로 칭찬하였다. 공자는 동이족의 풍습을 기록했던 것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공자가 東夷(동이)는 君子不死之國이라 했다고 배웠다. 그럼에도 왜 정작 군자불사지국인지는 전혀 모르고 있지 않은가.

 

왜 공자는 구이를 흠모했는가. 환단고기를 읽다 보면 그 이유를 명확히 알게 된다(夷 東方之人也, 南蠻從蟲, 北狄從犬, 西戎從羊 唯 東夷從大 大人也 夷俗仁 仁者壽 有君子不死之國 故孔子曰 道不行 吾欲之君子不死之國九夷 承孚 浮於海 有以也).

 

동이(東夷)란 동쪽 사람이다. 오직 동이(東夷) 만이 대의(大義)를 따르는 대인(大人) 들이다. 동이(東夷)의 풍속은 어질다. 어진 사람은 장수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군자들이 죽지 않는 나라가 있나니(有君子不死之國), 고로 공자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중국에 도가 행하여지지 않으니 나는 군자불사지국(君子不死之國)인 구이(九夷) 나라에 가고 싶다" 하시고 뗏목을 타고 바다로 띄웠다 한다. 참으로 이유 있는 일이로다. 欲居九夷(욕거구의)라고도 했다.


동이에서 거주하고 싶다. “동이에서 살고 싶다” 라는 것이다. 춘추전국시대 도덕정치가 무너지고 패왕들이 들끌던 시대, 동이 군주의 홍익인간에 바탕을 둔 정치적 이상에 대해 익히 알았다는 이야기다. 환단고기에는 공자가 왜 그리 이야기했는지를 명확하게 알려 주고 있다. 환단고기는 위서 논쟁을 떠나 엄청난 정신 가치관을 전하고 있다.
  
『환단고기』를 위시한 여러 역사 기록을 종합하면, 소련과 대련은 고조선 사람으로 동북아에서 3년 상의 상례를 처음으로 실행하였다. 상례 문화 또한 고조선에서 가장 먼저 발달하였던 것이다. 논어에서 공자자신의 가르침과 저술을 述而不作(술이부작)이라 했다(나는 옛사람의 설을 저술했을 뿐 창작한 것은 아니다). 이는 전승돼 내려오는 것을 전술(傳述) 할 따름이지 새로운 것을 창작하지 않았다는 의미인데 공자 가르침의 사상적 근간은 환단시대의 동이 문화였던 것이다.

인류 창세사를 다시 쓰게 한 홍산문화①

진실의 역사

인류 창세사를 다시 쓰게 한 홍산문화


◉ 동북아의 여러 신석기 문화
130년에 걸친 이라크 지역의 유적 발굴을 통해 서양 문명의 뿌리인 수메르 문명이 세상에 드러난 것에 필적하는, 20세기 동북아 최대의 발굴 사건이 있다. 요서 지역(발해연안 지역)의 신석기·청동기 문화 발굴이 바로 그것이다. 프랑스인 에밀 리쌍이 1922년부터 1924년 사이에 내몽골 적봉 지역에서 신석기 유적지 22곳을 발견한 이래, 21세기인 지금까지도 발굴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2006년 6월에도 거대 유적지가 발굴되었다. 내몽골 적봉시 오한기敖漢旗의 초모산草帽山 유적지에서 5,500년 전 적석총군이 발견되었다.(중국 CCTV 보도 내용, 2006.6.10)
  
요서에서 발견된 가장 오랜 신석기 문화는 8,5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소하서 문화이다. 현지인조차 길을 찾지 못하는 오지에 위치한 소하서 유적은 당국의 문화재 신고 정책에 따라 주민이 신고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중국은 이 문화를 ‘인류 최고最古의 신석기 문화’라고 규정하였다.
그런데 소하서 유적은 7,000~8,000년 전에 만들어진 발해 연안 빗살무늬토기와 그 연대가 일치한다. 발해 연안 빗살무늬토기는 그 재질과 모양이 만주와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빗살무늬토기와 같은 계통이다. 이것은 소하서 문명의 주인공과 동방 한민족의 강한 연관성을 보여 준다.
  
요서의 여러 신석기 문화 가운데 홍산문화는 세간의 가장 뜨거운 관심을 끌었다. 요령성 조양시 건평建平현과 능원凌源현의 접경지역에서 번창했던 홍산문화는 신석기 말기의 문화로 ‘석기와 청동기를 섞어 사용한 BCE 4700~ BCE 2900년경의 문명’이다. 하가점 하층에서는 BCE 2400~BCE 1500년에 걸쳐 농경집단의 청동기 문화가 나타났다. 이 하층에서 비파형 청동검이 나왔는데, 그것은 청동기 문화의 대표적 유물로¼ 만주와 한반도에¼ 발굴된 청동검과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하가점 하층문화는 고조선 문화이고, 하가점 지역은 고조선의 영역인 것이다.
이처럼 문헌 기록으로 보나 유물로 보나, 고조선은 한반도에서 요서에 이르는 드넓은 땅을 차지한 동북아시아의 대국이었다.
  
1954년에 중국 학자 인다尹達는, 철광석으로 뒤덮여 산 전체가 붉게 보이는 ‘홍산紅山’에서 이름을 따서 이 문화를 ‘홍산문화’라 명명하였다. 이형구는 홍산문화를 ‘발해연안문명’으로 부를 것을 제안했다. 발해연안이란 발해를 둘러싸고 있는 산동반도, 요동반도, 한반도를 말한다. 세계 4대문명과 마찬가지로 이 문명은 북위 30~45°에서 발생하였다. 그는 “지중해 문명(지중해를 둘러싸고 태동한 이집트 문명, 에게 문명, 그리스로마 문명)이 서양 문명에 자양분을 공급했듯이, 동이족이 발해연안에서 창조한 문명은 중국은 물론 만주, 한반도, 일본의 고대 문명을 일궈 내는 젖줄이었다”라고 밝혔다. 

◉ 고대국가의 기틀인 총塚·묘廟·단壇이 모두 나타나는 홍산문화
홍산문화는 1979년 객좌현 동산취촌東産嘴村 발굴과 1983년 그 인근 우하량촌牛河梁村 발굴을 계기로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동산취에서 엄청난 제사 유적이 발견되고, 우하량에서 돌무덤[塚], 신전[廟], 제단[壇]이 한꺼번에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이형구 교수는 총·묘·단을 인류의 정신문화를 가능하게 하는 3요소라 한다. 이 3요소가 모두 나온 것은 다른 신석기 문화에서는 볼 수 없는 전혀 새로운 모습이었다.

 

우하량의 16개 유적지 가운데 13곳이 돌무덤, 즉 적석총 유적지이다.

적석총은 고대로부터 삼국 시대 때까지 계속 나타나는 동이족의 대표적 묘제墓制로 황하지역의 화하족 문명권에서는 전혀 출토되지 않은 것이다. 충적층 지대인 황하 지역에 살던 화하족(중국 한족의 조상)은 땅에 구덩이를 파고 직접 주검을 묻거나 관을 묻는 형식의 널무덤(토광묘土壙墓)을 지었고, 산악과 평지가 공존하는 요서 지역에 살던 동이족은 주로 돌무덤을 지었다.

우하량의 돌무덤은 약 5,500년에서 5,000년경 전에 조성된 것이라 한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돌무덤은 BCE 2000~BCE 1500년경의 것이다.

 

이에 대해 이형구 교수는 요서 지역 사람들이 한반도로 이동했거나 요서 문화가 한반도에 전파된 결과라고 한다. 그리고 ‘적석총, 석관묘 등의 돌무덤이 시베리아에서 기원되었다’고 말하는 강단사학계의 학설은 설득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요서의 돌무덤이 시베리아 것보다 1,500년을 앞서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한민족은 시베리아보다 요서 지역과 문화적으로 더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강조하고, 돌무덤 문제만으로도 우리 민족과 문화의 기원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결론짓는다. BCE 4천 년대에 요서에서 돌무덤을 짓고 문명을 일군 동이족은 바로 배달의 백성이다.
  
우하량의 여러 적석총 무덤 중에서 특히 주목을 받는 것은 제2지점의 방형 적석총이다.

‘중심에 큰 적석총(돌무지무덤)’과 그것을 에워싼 ‘27기의 석관묘(돌널무덤)’로 이루어져 있다. 최고 통치자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중앙 대묘를 주변의 작은 무덤들이 에워싸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무덤 양식은 홍산인들이 이미 씨족사회를 넘어서 계급이 분화된 국가 단계의 문명을 누렸음을 시사한다.

이 대형 무덤군의 바로 옆 자리에서 원형으로 쌓은 적석총도 함께 발굴되었다. 조사 결과, 원형 적석총은 원래 최하단의 직경이 22m에 달하는 3단 높이로 지어진 것이었다. 일반적인 돌무덤의 양식과 다른 이 건축물의 용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중국 학자들은 이 적석총의 용도에 대한 실마리를 명·청의 황제들이 천제를 지내던 북경 천단공원에서 찾았다. 그곳 원구단이 우하량 적석총과 동일한 형태의 원형 3단이기 때문이다. 우하량 적석총도 천단공원의 원구단과 마찬가지로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릴 때 사용하는 제단으로 지어진 것이다. 우하량 제2지점의 이 원형 제단이 홍산인의 정신문화를 보여 주는 또 다른 요소인 단壇을 대표한다.
  
각 층의 둘레를 따라 늘여 세워진 원통형 토기 또한 이 원형 건축물이 제단이었음을 말해 준다. 요령성 조양시의 덕보박물관 왕동리王冬力 관장은 이 독특한 토기에 대해 “토기의 위쪽에 덮개가 없고 아래쪽에 바닥이 없는 것은 천지가 하나로 통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제사장은 제단의 주변에 원통형 토기를 둘러 세워 하늘과 통하는 소통로를 만들었다”라고 해석한다.
  
방형으로 짜여진 대형 무덤군과 천제를 올리던 제단을 함께 갖춘 우하량 제2지점 유적은 또 한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그 전체 구조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방정하다’는 동양의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표현한다는 사실이다. 천원지방은 ‘아버지 하늘의 정신은 둥글고, 어머니 땅의 정신은 방정하다’로 해석된다. 천원지방 사상이 일본으로 전해져 전방후원형(앞쪽은 네모나고 뒤쪽은 원형인 형태) 무덤의 형태로 나타났다. 천원지방 구조는 배달 시대 이후 고조선 때 지은 강화도 마리산의 참성단, 명나라 때 지은 북경의 환구단, 조선 말기에 고종 황제가 세운 원구단 등 제천단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5,500년 전에 배달 동이족이 세운 우하량 제단은 동북아 제천단의 원형이고, 나아가 배달의 천제 문화는 동북아 천제 문화의 뿌리인 것이다. 
  
홍산문화를 일군 배달 동이족의 놀라운 수준을 보여 주는 셋째 요소인 신전(廟)은 우하량 제1지점에서 발굴되었다.

그런데 신전의 주인공은 뜻밖에도 여신이었다. 이형구는 홍산인들이 여신을 모신 사당을 지어 지모신地母神에게 제사 지냄으로써 풍년과 다산多産을 기원했다고 말한다. 여신묘가 상당히 좁은 것으로 보아, 이곳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 특권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전에 들어가 제를 지낸 이는 제정일치의 고대 사회에서 하늘과 인간을 이어 주는 중매자 구실을 한 정치적, 종교적 수장으로 단 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총·묘·단이 모두 나타나는 우하량은 홍산인의 성지였고 제정일치 시대였던 당시에 임금이 하늘과 소통하던 곳이었다. 한마디로 우하량은 당시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이러한 점은 우하량이 동서 10km, 남북 5km에 걸쳐 있는 홍산문화 유적지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데서도 알 수 있다.

 

◉곰을 숭상한 홍산인
그런데 반지하식 구조로 지은 우하량의 여신묘 터에서 여신상과 함께, 홍산인의 토템 신앙을 보여주는 곰 소조상과 새 소조상이 발굴되었다. 곰 소조상은 여신묘의 주실主室에서, 새 소조상은 북실北室에서 출토되었다. 곰토템과 난생설화는 한반도와 북방유목민족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삼국유사에서 이야기하는 곰과 호랑이의 이야기를 신화로 알고 있었는데 홍산유적에서 웅녀여신상과 곰발바닥 옥웅룡 등이 발굴 된 것이다. 마치 고대 그리스의 트로이의 목마신화가 1870년대 트로이 유적지가 발굴되면서 역사적 사실로 드러났던 것과 같이 마찬가지로 말이다.
  
우하량뿐 아니라 광범위한 인근 지역에서 ‘옥으로 만든 곰·용 혼합 형태의 형상물[玉熊龍]’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곰 토템이 아주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홍산문화 유적지 전체에서 발굴된 옥기 가운데 웅룡熊龍이 상당히 많은데, 이것은 주로 죽은 자의 가슴 위에 놓여 있었다. 가슴팍에는 가장 등급이 높은 옥기가 놓인다는 점에서 곰을 얼마나 신성시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여러 적석총 무덤에서 새 모양의 옥기가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홍산인이 새 토템 신앙도 하였음을 보여 준다. 현재도 동북아시아와 한반도 전역과 일본 등에도 이 새를 토템으로 하는 솟대문화가 광범위하게 남아있다.
  
여신을 모시고 곰과 새를 신성시한 홍산인을 환단 시대의 배달 동이족과 연관지을 수밖에 없는 역사적 사건을 『환단고기』에서 전하고 있다. 바로 배달이 세워진 직후, 호족과 웅족이 환웅천황을 찾아와 환족으로 교화되기를 청한 사건이다. 호족은 호랑이를 토템으로 하는 남권 중심의 사나운 부족이고, 웅족은 곰을 토템으로 하는 여권 중심의 우매한 부족이었다. 삼신의 도를 깨쳐 광명 인간이 되기 위해 두 부족은 일체의 활동을 금하고 수행 공부에 들어갔다. 하지만 호족은 공부를 중도에 그만두었고 웅족은 굶주림과 추위 속에 무사히 수행을 마치고 환족이 되었다.
이처럼 요서 지역의 유물과 『환단고기』가 밝히는 내용을 종합해서 볼 때, 홍산문화는 환단(환국과 배달)의 문화로 볼 수밖에 없다.